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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레의 개척자에서 ‘리틀엔젤스’의 대모까지: 신순심의 춤과 삶_ 순(順)한 마음(心)으로 일궈낸 어린이 예술 외교의 금자탑

※ 본지는 ㈜국악신문사와의 기사 교류 협약에 따라 『국악신문』 2026년 3월 5일 자 [윤중강의 인사이트] 「한국 발레의 개척자에서 ‘리틀엔젤스’의 대모까지: 신순심의 춤과 삶」을 수정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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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7-2 (2026.3.20.) 발행

글·사진제공_ 윤중강(공연평론가)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신순심의 무당춤

1. 발레리나 신순심, ‘안정감 있는 신인’으로 피어나다

“한국무용에도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선천적으로 무용가의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한국무용을 잘 조화시켜 한국발레를 창조할 수 있는 좋은 개척자이다.”(1961.11.18. 동아일보)

제3회 동아무용콩쿠르에 <즐거운 계절>이란 발레 작품으로 참가한 신순심(申順心, 당시 이화여대 체육교육과 재학)을 본 심사위원 박외선(이화여대교수)의 평이다. “움직임에서 정확한 발의 위치와 상수 쪽으로 몰아가는 파 드 부레(Pas de bourrée)는 양의 가장 아름다운 특색이자 찬양할 점”이라고 칭찬했다. 1962년 발레 부분 금상, 1965년 한국무용 부분 은상을 받은 신순심 관련 기사의 타이틀은 ‘안정감 있는 신인’이었다.

신순심은 원래 발레리나를 꿈꿨다. 한국무용을 병행하면서, 송범 문하에서 발레를 5년간 수학하고 동아무용콩쿠르에 참여하게 된다. ‘송범 주리 발레무용연구소’(서울 중구 퇴계로 220)에서 발레를 배웠다. 이화여대 체육교육과(무용전공)를 졸업하고 여학교에서 체육교사로 활동하던 신순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신순심 단장과 함께 한 리틀엔젤스예술단

2. ‘어린이 외교사절단’의 탄생과 신순심의 결단

한국문화자유재단은 ‘노래와 춤을 함께하는 어린이 외교사절단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신순심에게 그 책임을 맡아주길 제안하게 된다. 신순심은 결심한다. “4·19 혁명 이후 혼란기의 한국은 대외적으로 전쟁, 고아, 빈곤, 이렇게 셋으로 상징되는 나라”이다. 신순심은 해외에서 후진국으로밖엔 여겨지지 않았던 한국을 어린이의 춤을 통해서 밝고 희망찬 면을 보여줘서, 외국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신순심은 본인이 춤을 추기도 잘 추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모셔서 어떻게 지도하는 게 최선인가를 잘 아는 현명한 인물이다. 신순심은 이미 부산 지역에서 어린이무용으로 큰 성과를 낸 박성옥(1908-1983)을 모셔서 선화어린이무용단(리틀엔젤스)을 지도하게 한다. 사실 ‘리틀엔젤스’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선화어린이무용단 또는 대한어린이무용단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해외에서 이들의 춤을 본 많은 매스컴이 이들을 ‘리틀엔젤스’로 부르기 시작한 거다.

리틀엔젤스의 상징적인 작품 꼭두각시

농악의 역동성, 리틀엔젤스의 하이라이트가 되다

리틀엔젤스의 제1차 해외공연(1965.9.7.-12.16.)과 제2차 해외공연(1966.10.14.-1967.2.28.)을 성공시키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당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의 첫 번째 귀국 공연(1966.2.1.-2.2.)과 두 번째 귀국 공연(1967.3.18.-3.20.)을 통해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또한 여자 어린이 단원을 중심으로 하되, 한국의 농악의 역동성을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에 하이라이트에 집어넣었다. 초창기에는 이성진의 12발 상모가 인기를 끌었고, 이후에 김덕수, 최종실 등이 참여하면서 농악을 보강해서 설장구, 채상소고, 12발상모로 체계화시켰다.

리틀엔젤스의 “그랜드 휘날레”는 농악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대개 1부의 끝 순서가 농악이었다. 그러나 1969년부터 해외 공연에서 끝 순서가 농악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멕시코 올림픽을 경험한 신순심의 예술감독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겠다.

안제승 연출 및 무대감독, 김백봉, 김문숙, 송범, 전황, 신순심, 1968년, 멕시코올림픽, 한국공연

3. 현장을 발로 뛴 단장, ‘리틀’을 ‘빅’으로 키우다

신순심 단장은 ‘발로 뛰는’ 단장으로 유명했다. <꼭두각시>는 리틀엔젤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이고, 여기에 목탁은 필수 악기다. 이때 목탁은 크기가 다르고 음높이와 음색 또한 달라야 한다. 지금 같으면 국악사도 있고 만물상도 있어서 목탁을 구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지만, 1960년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리틀엔젤스의 음악감독 역할을 한 박성옥은 여러 개의 목탁이 필요하고 그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신순심은 좋은 소리를 찾아 여러 지역의 절을 직접 돌아다니며 목탁을 구해왔다. 이 일화를 필자에게 전해주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큰 감동을 받았다. 리틀엔젤스 성공의 배후에는 신순심의 이런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

또한 신 단장은 일찍이 농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순심 단장은 일찍이 농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리틀엔젤스 내에도 늘 상주하는 남자 단원이 필요함을 생각했다. 그 이전까지는 남자 단원을 스카우트해서 갔으나, 이후에는 남자 단원을 상주하기로 결심한다. 1969년 10월 22일-10월 24일(3일간), 대구공설운동장(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신순심 단장은 이때 대구로 갔고 2명의 남자 어린이를 리틀엔젤스의 ‘농악특기생’으로 합류하기로 한다. 그게 바로 김상현(농고 1년)과 최병삼(초등 재학)이다. 김상현은 당시 강원도 대표, 최병삼은 부산 대표로 참가했다. 리틀엔젤스는 국내와 해외의 시사저널지에도 표지와 특집 기사로 다뤄졌다. 여기에 보이는 두 남자 단원이 바로 김상현과 최병삼이다.

1970년대 초반 시사그래픽 표지, 남자단원, 왼쪽 감상현,  오른쪽 최병삼

이리하여 지역 출신의 두 명의 소년이, 리틀엔젤스의 연습 공간에 상주를 하게 된다. 당시 두 소년의 부모님의 결심도 중요하겠지만(통신 등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이 두 어린이가 서울 생활을 할 수 있게 됨에는, 신순심의 설득과 부모의 결심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 같다. 리틀엔젤스의 최병삼 등은, ‘아이스케키’만 알던 시절, 외국 공연을 가면 여러 색깔의 아이스크림이 쌓인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었다는 추억을 얘기하곤 했다. 

리틀엔젤스가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린이들의 인성교육과 학교 교육을 병행한 것이다. 해외 공연으로 학교 교육을 못하는 상황에서도, 어린이들의 학습 능력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지도했다. 어린이들을 일기를 쓰게 했고, 그런 일기가 매스컴에 공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 단장 신순심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신순심 단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틀엔젤스 단원 중에 무용가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들에게 칠십 나이에도 춤을 추는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1894-1991)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지금은 ‘리틀엔젤스’이지만, 훗날 ‘빅엔젤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단장의 이 염원은 훗날 현실이 되었다. 리틀엔젤스를 거쳐 간 어린이들은 훗날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 그리고 발레리나 강수진과 문훈숙 등 한국 예술의 위상을 드높인 거장들로 성장하며 진정한 ‘빅엔젤스’의 계보를 이었다.

4. 멕시코 올림픽의 환호와 뉴욕 유엔 본부의 감동

리틀엔젤스가 크게 알려진 것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이다. 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선수들의 경기 이상으로 더 큰 화제가 된 것이 리틀엔젤스의 공연이었다는 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당시 멕시코 일간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서 리틀엔젤스는 예정보다 더 많은 횟수의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 멕시코 올림픽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김백봉, 김문숙, 송범, 전황과 함께 신순심이 포함되었다.

신순심은 그간 리틀엔젤스 공연에서 <무당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어린이들이 의상을 교체하는 동안에, 신순심은 <무당춤>을 선보였다. 관객들은 그의 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에너지에 매료되었고, 그러면서도 무용가로서의 아름다움을 결코 잃지 않는 그 모습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이는 당시 공연의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은 1973년 10월 24일 제28주년 '유엔의 날'을 기념하여 미국 뉴욕의 유엔 총회의장(UN General Assembly Hall)에서 특별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은 당시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전 세계 130여 개국 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춤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무대였다.

리틀엔젤스 유엔공연 길쌈놀이

5. ‘단심주’와 ‘길쌈놀이’: 엮임과 화합의 미학

이미 많은 언론에 노출된 것처럼, 이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레퍼토리는 ‘길쌈놀이’였다. 박성옥 안무인데, 이는 근대 한국의 단심주(丹心柱)와 연관된다. 요즘 이를 단심줄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오류다. 단심주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상징하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중앙의 기둥을 중심으로 여러 색의 끈을 엮으며 춤을 추는 형태이다. 이는 서양의 메이폴 댄스(Maypole Dance)가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되면서 한국적으로 변용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 견해다. 1900년대 초 이화학당 등의 근대 교육기관에서 운동회나 축제 때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당시 학생들에게 협동심과 애국심(단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최근 '단심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역사적 맥락에서는 기둥을 의미하는 '단심주'가 원형에 가까운 용어이다.

리틀엔젤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길쌈놀이‘는 특히 유엔 공연을 통해서 더욱 환영받았다. 그런데 ‘단심주’와 연관되는 춤은 조선의 궁중정재인 ’선유락‘과도 통한다. 화려하게 꾸민 배(채선, 彩船)가 중앙의 '기둥' 역할을 하며, 무용수들이 배에 매달린 밧줄(닻줄)을 잡고 배를 에워싸며 돌면서 춤을 춘다. 두 무용 모두 '중심(기둥/배)'과 주변(무용수)을 끈으로 연결하여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는 군무라는 구조적 틀이 일치한다. 선유락에서 닻줄을 끌며 배를 이동시키고 주위를 도는 동작은 시각적으로 실을 잣거나 직물을 짜는 '길쌈'의 역동성과 닮았다.

6. 영원한 리틀엔젤스의 대모, 고이 잠들다

리틀엔젤스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변동 속에서도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을 통한 세계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고자 하는 의도는 계속되었다. 리틀엔젤스는 성장하면서 신순심 단장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언제나 신순심은 리틀엔젤스에게는 대모(大母)와 같은 존재였다.

오랫동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순심은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 6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2022.1.19. 선화예술중학교 선화아트홀)에 오랜만에 나들이하였다. 이때 발표자의 한 사람이었던 필자도 신순심 단장을 직접 뵐 수 있었다. 신순심 단장은 짧은 시간에도 많은 중요한 얘기를 해주었고, 참석자와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 마음이 고와야 노래가 곱다 / 마음이 고와야 얼굴이 곱다

2026년 3월 4일, 리틀엔젤스 역사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역할을 했던 신순심 단장은 영면했다. 신순심 단장은 평생 순한(順) 마음(心)으로 살아왔으며, 그가 아직도 리틀엔젤스 단훈을 아이들과 함께 말하는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고인의 영전에 바친다.

2022년 1월 19일, 리틀엔젤스 창단 60주년 기념 공연을 마치고

2022년 1월 19일, 리틀엔젤스 창단 6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신순심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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