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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포스트코리아 ABC4Dance(9): 한국에서 ‘춤미학’을 한다는 것_ 근대 미학의 성립에서 존재론적 몸의 사유까지

댄스포스트코리아는 민족미학자 채희완 선생의 춤미학 세미나의 후기 연재를 통해 춤의 역사를 다시 쓰기보다 다시 읽는 비평적 시선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춤이 스스로의 언어를 되찾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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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7-1 (2026.3.5.) 발행


글 ·사진_ 오정은(전북대학교 강사)


댄스포스트코리아에서 진행하는 ‘ABC4Dance(Aesthetic, Basis, Criticism for Dance)’에서는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춤미학의 대가인 채희완 선생님의 세미나가 작년부터 진행되었다. 세미나는 1부 ‘미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춤은 무엇인가’, 2부 ‘춤은 어떻게 미의식의 대상으로 전이되는가’로 진행되었으며, 이번 글은 3부에 해당하는 ‘한국춤 미학 연구에서 쟁점은 무엇인가’ 주제 중 1회차에 해당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정은 2026년 1월 2일(금)이며, 장소는 서울예술인지원센터 미팅룸1에서 진행되었다. 


2026년 1월 2일, 3부의 첫 세미나에서는 채희완 선생님의 새해 인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평안하십니까? 2026년 병오년(丙午年) 말띠의 해를 하루 지나고 시작합니다. 아직도 몸의 체질상 설날 기분이 양력으로는 다가오지 않아서 공식적으로는 새해지만은 육체적으로는 아직도 연말 중입니다. 오늘 다시 시작하는 춤미학 심층 연구 강좌 3기의 첫날에 새로운 테마를 잡아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 말하자면 묵은해를 아직 덜 보냈다는 그런 의미로 지난 1기, 2기 때 논제는 잡아놨으나 실제 얘기를 하지 못했던 부분을 보완적으로 간략하게 스쳐 지나가고 3기의 다뤄야 될 그 틀을 얘기하는 것으로 오늘 이 시간에 내용을 그렇게 구성하기로 하였습니다.”


 

강의 중인 채희완 선생님

 

지난 기수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다시금 언급하며, “한국에서의 춤미학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겠는가?”, ‘한국 땅에서 미학을 한다’라는 것과 ‘한국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등의 질문들로 시작되었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미학’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언어가 과연 한국 춤의 경험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으로 파악되었다.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탄생 


독일철학자 알렉산데르 고트리프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은 1750년 『Aesthetica(미학)』 책 발간을 하였다. 이 책의 발간으로부터 ‘미학’이 하나의 학문이 성립되는 것으로 보고 바로 그것을 근대 미학의 시초로 보았다. 이전에도 미와 예술에 대한 사유는 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철학, 수사학, 예술론의 일부로 흩어져 있었을 뿐, 독립된 학문 체계는 아니었다. 바움가르텐은 이를 인식론의 한 영역으로 설정하며 감성적 인식이라는 고유한 차원을 학문적으로 승인하여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문’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즉, 바움가르텐으로 인해 ‘미학’이 학문의 하나로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는 『판단력 비판』(1790)을 통해 미학의 지위를 한 단계 끌어올려, 미학의 독자성 독립 학문으로서의 성립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칸트는 미를 쾌·불쾌의 감정에 따른 주관적 취미 판단의 영역으로 보았다. 이 지점에서 미학은 인식론이나 윤리학과 구분되는 독립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인간은 동일한 인식 능력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특정 대상에서 느낀 쾌는 타인에게도 공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 미는 인식적 참·거짓의 문제도, 윤리적 선·악의 문제도 아니다. 미학은 독자적 영역을 확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미적 태도는 대상에 대한 실용적, 도덕적, 인식적 목적을 배제한 상태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거리두기’가 전제된다.


서양 미학의 분화(分化)와 비교의 문제


19세기에는 서양에서 근대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아주 다양하게 펼쳐지기 시작하며 유럽계열, 영미 계열을 넘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근대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출발을 각자 자국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그런 시각도 생겼다. 제3세계권의 경우 자국의 풍토, 자국의 환경 속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제3세계권이라고 하는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한국도 포함되어 그런 지역에서 발생되는 것,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그런 지역과 민족에서의 자기 독립성, 독자성 자기 생존권의 문제와 결부돼서 나타난 자국 중심의 학문의 성립을 보는 경향과 가치를 논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후반에는 비교미학, 민족미학, 종족예술학 등이 등장하며 각 문화권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흐름이 형성된다. 그러나 비교에는 전제가 있다. 동일 평면상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조건, 동일한 맥락 위에서 비교하지 않는 한, 비교는 왜곡이 된다. 한국 춤의 특성을 논하면서 일본의 20세기 초 남성들의 춤과 한국의 20세기 초 여성들의 춤을 교차시키는 방식은 방법론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 춤의 미적 특성”을 말하려면, 먼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과 그 해체


19세기 이후 예술은 점점 자율성을 강조하게 된다. 예술은 삶과 분리된 고유한 영역이 되고, 예술 작품은 일상 사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위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경계는 급격히 흔들렸다. 1964년,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브릴로 상자(브릴로는 세제이름)를 전시했다. 관람객들은 판매용 상품 상자(공산품)와 그것을 모방한 작품 사이에서 차이를 식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예술비평가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예술 작품이란 시각적인 것을 넘어 해석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 되 것이다. 평범한 사물이 ‘예술계(art world)’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그것은 의미를 진술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술의 본질은 감각적 특성이 아니라 개념적 맥락으로 확장되었다. 요즘 한국 무용계에서도 흔히 일어나도 있는 동시대 예술처럼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붕괴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브릴로 박스(1964) 출처: 네이버 이야기꾼 블로그

 

동양의 다른 길 — 수석/ 동양의 사유: 이미 흐려진 경계


위에서 언급한 예술의 경계 해체는 서양 근대 예술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술과 사물의 경계가 그렇게 단단히 설정되지 않았었다. 동양의 사유에서는 애초에 그러한 경계가 그토록 단단했던가? 수석의 예를 들어볼 수 있다. 수석(壽石)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그것은 산천의 축소판이며, 자연의 기운이 응축된 존재로 여겨진다. 이끼를 입히고, 자리를 마련하고, 생활 가까이에 두는 행위는 사물을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수석은 “예술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만물이 이미 미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감정 이입의 심층적 경험이 전제되어 있다. 대상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대상이 나에게 들어오는 상호 침투, 이것은 칸트적 무관심과는 다소 다른, 생명론적 일체감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을 특별한 영역으로 격리하기보다, 세계 전체를 미적 체험의 장으로 확장하는 것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수석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비교미학의 전제-춤에게 질문하기


20세기 후반 생태학과 생성 이론은 사물을 자기 조직화하는 생명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에서는 이미 돌, 나무, 사물에 생명적 위상을 부여해 왔다. 사물을 공경한다는 사상, 예컨대 동학의 ‘경물(敬物)’은 인간 중심적 미학을 넘어서는 사유를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브릴로 상자는 해석을 통해 예술이 되었지만, 수석은 애초부터 존재론적 차원에서 예술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비교미학과 민족미학이 등장하며 각 문화권의 미적 특성을 밝히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비교에는 반드시 전제가 따랐다, 동일 평면 위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적 조건, 사회적 맥락, 예술 제도의 구조가 다르면 비교는 쉽게 오해로 흐른다. 한국 전통 춤의 미적 특성을 논하면서 서양의 현대무용의 기준을 암묵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균형한 비교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 예술이나 문화와 한국 문화와 예술과 중국 문화와 예술의 특성을 같이 놓고 얘기할 그런 역사적 여건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일본 민예(민속예술) 연구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 문화의 특성을 얘기하면서 일본의 것과 중국의 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한국적인 것이 있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비교를 했다고 한다. 일본의 것은 색채감이 짙고, 중국의 것은 규모의 크기가 다르고, 웅장하다라는 것에 비해 한국의 것은 선묘적이라고 했다.


채희완 선생님은 한국에서 춤미학을 한다는 것은 서양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비판적으로 배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질문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철학적 전제 위에서 춤을 이해하고 있는가? 몸을 사물처럼 다루는가? 존재로 대하는가? 움직임을 형식으로 보는가? 생명 운동으로 보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춤의 미학을 접근해 보아야 한다.


춤으로 돌아오기


춤 역시 ‘이것은 춤이고 저것은 춤이 아니다’라는 경계 설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인간의 움직임 자체가 이미 생명 운동이라면, 그 운동은 언제부터 춤이 되는가? 존재성이 사라진 움직임(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몸짓)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는 행위 혹은 일상의 몸을 다시 생명적 운동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우리는 춤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다. 한국에서 춤미학을 한다는 것은 단지 한국 춤의 형식적 특성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미학의 틀을 성찰하고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재검토하며 사물과 몸을 생명적 존재로 재인식하고 동일 평면 위에서 한국 춤의 존재 조건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한국 춤은 무엇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하게 하는가?”

“그 미적 체험은 어떤 존재론적 태도에서 비롯되는가?”


최근 철학과 과학에서는 생성, 자기조직화, 생태적 상호의존성이 강조된다. 세계는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관계망으로 이해된다. 이 관점에서 몸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몸은 끊임없이 환경과 교환하며 스스로를 조직하는 존재다. 춤은 이 생명 운동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나 근대 미학의 틀 안에서 춤은 종종 형식적 아름다움, 기술적 완성도, 양식적 특성으로 분석되어 왔다. 한국 춤의 느림, 호흡, 여백, 흐름을 단순히 스타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이 스며 있지 않은가?


춤은 언제 춤이 되는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이 된 것은 해석의 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의 움직임은 언제 춤이 되는가?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인가? 특정한 훈련을 받았을 때인가? 아니면 관객이 그것을 춤으로 인식했을 때인가? 존재성이 사라진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혹은 일상의 몸짓이 생명적 울림으로 재인식되는 순간인가? 그 지점에서 춤은 발생한다. 한국에서 춤미학을 한다는 것은 춤을 작품으로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존재론, 움직임의 생성성, 관계적 세계관, 생명에 대한 태도를 함께 사유하는 일이다.


한국 춤의 미적 특성을 논하는 일은 단순히 전통 양식의 특징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미학의 전제를 성찰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를 재검토하며, 몸을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다시 바라보는 철학적 작업이다.


춤이 탄생이 되는 그 배경, 춤을 추는 춤꾼의 경험, 모든 요소의 결합, 해석 등을 다시금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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