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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의 시선] 완성의 견고함 너머, 위험한 균열을 기대한다: 현대무용단 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 II〉

[무용가의 시선]은 현장 무용인들이 동료 무용가들의 공연을 쓰는 댄스포스트코리아의 새로운 비평 코너입니다. 무용인들의 전문 시선을 통해 공연의 이면과 작품의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동시대의 춤을 새롭게 기록해 갈 것입니다.

포커스 [무용가의 시선]

Vol.126-1 (2026.2.5.) 발행


글_ 손인영(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사진제공_ 현대무용단 탐



46년을 맞이하는 현대무용단 ‘탐’은 긴 역사만큼 여전히 안정적이고 탄탄한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조은미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을 이어온 탐은, 2023년에 이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 II〉를 다시 선보였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2020년 애니메이션 〈Soul〉을 출발점으로 삼아, ‘목표지향적 인간’이 아닌 오늘날 MZ 세대의 감수성에 가까운 ‘감각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성취나 목적이 아니라, 매일 감각하며 살아가는 ‘몸’ 그 자체의 중요함이다. 삶의 이유를 설명하려 들기보다,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느끼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몸짓으로 풀어낸다. 작품은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찾기보다, 그 순간의 감각과 현존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를 권한다.

 

강혜민 〈흔들리며〉

 

안무가 강혜민, 차은비, 김하영, 이혜지는 작품의 주제를 각자의 감각으로 간결하게 치환해 신체 언어로 풀어냈다. 페미니즘 적이면서도 시적인 이미지들은 과잉 없이 적절한 호흡 속에서 전개되며, 각 안무가 고유의 몸짓 언어를 통해 소담하고 밀도 있게 제시된다. 그 결과 작품은 무거운 철학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지루하지 않은 감각을 유지한다.


각 안무자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이 영상들은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여러 이미지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순간 무대 위의 움직임으로 전환된다. 영상은 단순한 도입부가 아니라, 작품의 정서와 방향을 미리 제시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첫 작품 강혜민의 〈흔들리며〉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출발한다. 영상 속에서 하얀 천은 흔들리며 무용수의 움직임과 일치하는 듯하다 때로는 미묘하게 어긋나며 긴장을 만들어낸다. 무대 위에서 무용수는 네모로 접힌 묵직한 천을 붙들고, 그것을 잡거나 끌어당기고, 천위에 눕거나 들어 올리는 등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천과 신체의 관계를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천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신체를 확장하고 저항하는 물성으로 기능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에는 서서히 틈이 생기고, 사각으로 고정되었던 형태는 점차 풀리며 유연해 진다. 네모난 형태가 지니고 있던 답답함은 완화되고, 펼쳐진 천은 비로소 공간을 갖는다. 이때 드러나는 천의 자연스러움은 관객의 미감을 포착한다. 단단한 사각의 질서보다, 헝클어짐과 흔들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더욱 강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각이 목적을 내장한 형식이라면, 이 흔들림은 목적을 상실한 상태에서 비로소 발생하는 미감이다.

 

차은비 〈틈이 시작되는〉

  

김하영 〈작은 파편들〉

 

차은비의 〈틈이 시작되는〉도 영상에 이어 무대 위에 구불거리며 뒤엉킨 오렌지색 전선과 객석을 등진 채 앉아 있는 무용수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전선은 콘센트에 꽂혔다가 다시 빠지기를 반복하며, 연결과 단절의 행위를 통해 관객의 사유를 유도한다. 훈련된 유려한 몸짓을 지닌 차은비는 꼬여 있는 전선을 들어 올리거나, 길게 늘어진 선을 따라 움직이는 동작을 통해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신체화한다. 엉킨 선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그 사이에 형성되는 공간, 그리고 마지막에 플러그를 빼는 행위는 중의적이라 관객을 해석의 틈 사이에 머물게 한다.


김하영의 〈작은 파편들〉은 강렬한 주제 의식으로 출발한다. 물감이 흩뿌려지는 순간, 화면 위의 파편들은 서로 뒤엉키며 즉각적인 시각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는 ‘잭슨 폴락’의 드리핑 기법을 연상시키며, 우선적으로 감각과 미감을 자극한다. 무대 한편에 놓인 신문이 펼쳐지고, 그 위에서 혹은 그것을 활용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신문은 사건과 기록, 우연성을 함축하는 전통적인 오브제로서 충분한 상징성을 갖는다. 


구겨지고 뒤틀린 신문은 무용수의 움직임과 결합하며 낯선 형태를 만들어내고, 시각적·촉각적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하영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점차 뒤로 밀리고,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현상 자체에 대한 매혹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 결과 작품의 의미는 미감 속에서 다소 탈색된 채 남는다.


이혜지의 〈모퉁이에 서서〉는 조각난 흰 종이가 흩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혜지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 조각 몇 개를 집어 빈 검은 통에 담았다 다시 흩뿌리는 행위를 반복한다. 어느 순간, 비어 있던 통은 바닥을 굴러다니고, 이내 머리 위에 씌워진다. 그 움직임 속에서는 방향을 잃은 상태, 혹은 잃어버림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편안함이 포착된다. 이는 목적을 향하지 않는 걸음, 의도 없는 이동이다.


손에 어떤 종이조각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우연과 바닥에 흩뿌려진 수많은 조각들 사이에서 이혜지는 검은 외투의 투박함 속에 여린 신체를 감춘 채 세상의 우연들과 마주한다. 흰색 종이  조각들은 검은 외투와 뒤엉키며 무대의 미장센을 유려하게 완성한다. 외투 속에 숨겨진 작은 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목적 상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혹은 우연 속에서 발견되는 찬란한 삶의 잔광일지도 모른다. 작품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 II〉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이혜지 〈모퉁이에 서서〉

 

현대무용단 ‘탐’이 그동안 축적해 온 예술성은 네 명의 안무가를 통해 충실하게 구현되었다. 작품들은 미감 면에서 뛰어났고, 움직임의 완성도 또한 탁월했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선명하게 압축해내는 힘은 실로 인상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너무 모범적인 성취를 마주한 듯한 인상도 남는다. 마치 공부를 지나치게 잘하는 착한 학생을 바라보는 느낌처럼, 흠잡을 데 없는 완결성은 오히려 예측 가능함으로 다가온다. 오늘날의 예술은 정제된 주제의식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우연과 광기,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다. 창의성은 종종 이성의 경계를 벗어난 지점에서 가장 강렬하게 발현되기 때문이다.


물론 ‘탐’이 지닌 예술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적 성향을 대변한다.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길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예술의 흐름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의식하며 이 견고한 완성도 위에 조금 더 위험한 균열과 낯선 선택이 더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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