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Vol.125-1 (2026.1.5.) 발행
글_ 이희나(춤평론가·본지 편집주간)
사진_ 볼쇼이극장, 스타니슬랍스키극장, 마린스키극장, MuzArts
외국 레퍼토리 상실이 불러온 ‘창작 중심 전환기’
러-우 전쟁이 발발했던 2022년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다방면으로 많은 상황을 바꿔놓았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2022년 전쟁 시작 당시 인사이트 지면에도 썼던 것처럼 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이 일정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러시아 예술계의 반전(anti-war) 움직임과 서방의 대러 제재: 용기와 생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반대로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외국 예술가들은 대부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거나 러시아 이외의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문화적 우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분야는 폐쇄하더라도 문화 교류만큼은 유지했던 반면, 최근의 제재는 오히려 소통의 통로를 봉쇄해 버렸다는 점이 더욱 안타까운 상황이다.
예술가들의 물리적 이동뿐 아니라, 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던 서방 세계의 작품들을 더 이상 러시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뼈아프다. 볼쇼이발레단만 보더라도 꽤 많은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을 레퍼토리화해 왔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모리스 베자르의 <페트루쉬카>나 조지 발란신의 <심포니 인 C>가 공연되었으며, 최근까지도 조지 발란신의 <주얼스>,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거의 매 시즌 무대에 올랐다. 마린스키나 스타니슬랍스키발레단 역시 발란신 혹은 한스 판 마넨, 라이트풋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스타니슬랍스키는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를 공연하는 러시아 내 유일한 발레단이었다.
러시아의 탄탄한 발레 인프라를 통해 서유럽과 미국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으나, 이제 십수 년간 쌓아온 발레의 자산과 경험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발란신 재단과의 라이선스 종료로 그의 작품은 러시아 무대에 더 이상 오르지 못하며,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노이마이어는 계약 유지를 희망했으나 전쟁 초기의 경색된 분위기와 언론의 비판 속에 결국 계약을 종료했다. 필자가 볼쇼이 극장에서 2022년 봄에 마이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2023년 초에 발란신의 <주얼스>를, 그리고 2024년 봄에 노이마이어의 <안나 카레니나>를 관람하였는데 이때가 각 작품의 잠정적 파이널 무대였던 셈이다. 소리 없이 시즌 레퍼토리에서 사라진 크리스티안 슈푹의 <올란도> 역시 유사한 맥락이라 유추해 본다.
러시아 안무가의 성장과 미학적 스펙트럼의 확장
근 몇 년간 러시아 발레의 경향은 상당히 흥미롭다. 서구의 레퍼토리가 빠져나간 자리를 러시아 출신의 안무가들이 하나씩 채우고 있는 점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들은 단순히 신작을 창작할 뿐 아니라 고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이 만드는 작업에도 매진하고 있다. 많은 안무가들이 있지만 유리 포소호프(Юрий Посохов),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Вячеслав Самодуров), 알렉산드르 세르게예프(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 막심 페트로프(Максим Петров), 막심 세바긴(Максим Севагин), 파벨 글루호프(Павел Глухов) 등이 대표적으로 현재 러시아 발레 창작에 다양성을 불어넣으며 영역을 확장 중인 주요 안무가들이다.


그중 유리 포소호프는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해 온 중견 안무가로,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2015)이나 <누레예프(Нуреев)>(2017), <갈매기(Чайка)>(2021), <스페이드의 여왕(Пиковая дама)>(2024) 등 러시아적 소재를 큰 스케일로 풀어내며 볼쇼이의 현대 레퍼토리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연 예정이었다가 무산된 코코 샤넬 소재의 발레 〈Modanse〉를 안무하기도 했으며, 2025년에는 안나 아흐마토바와 안나 파블로바를 그린 더블빌 작품 <두 명의 안나(Две Анны)>에서 아흐마토바 편을 맡아 세련되고 시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 움직임을 고수하며 서사를 풀어나가는 드라마 발레의 경향을 띠고 있다.
서사적 특징을 가진 포소호프와는 달리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는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무대와 조명, 의상 등과 함께 빠르고 강렬한 움직임 프레이징과 이미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2011-2023년까지 우랄발레단의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발레단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볼쇼이발레단에서 <온딘(Ундина)>(2016)과 <댄스매니아(Танцемания)>(2022), <템페스트(Буря)>(2024)를 작업했으며, 2024년 스타니슬랍스키 발레단과 작업한 <근일점(Перигелий)>은 추상 발레의 긴장감을 유지하다가 폭발적으로 터뜨리는 강렬함을 증명해 보였다.

스타니슬랍스키 발레단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 직전 예술감독이었던 로랑 일레르가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20대의 젊은 무용가 막심 세바긴이 예술감독으로 발탁된 것은 파격이었다. 그는 예술감독이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여 레퍼토리를 채워넣고 있다. 2024년, 사모두로프의 <근일점>과 함께 발표한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다(Знаем благую весть)>는 아카펠라 합창에 맞춰 러시아의 민속적 소재를 재해석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었다. 작년에는 유리 포소호프와의 더블빌 공연에서 발레 역사 속 발레리나들에 대한 이야기인 <바리에이션의 여왕들(Королевы вариаций)>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 밖에도, 사모두로프에 이어 우랄발레단 예술감독을 맡은 막심 페트로프는 2025년 볼쇼이발레단에서 <작은 혹등말(Конёк-Горбунок)>을 새로이 작업하였으며, 마린스키발레단의 솔리스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프는 완전히 새로운 <코펠리아>(2024)를 안무하여 마린스키의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두 명의 안나>에서 파블로바 편을 안무한 파벨 글루호프 역시 현대적 감각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현재 러시아 발레는 위기와 가능성이 교차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교류의 단절은 분명 치명적인 제약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백으로 인해 내부 창작자들은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자신들만의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워가며 미학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지금의 과정은, 러시아 발레가 스스로 새로운 축을 형성해 나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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