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6-2 (2026.2.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
소리꾼 박인혜가 이끄는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이하 놀애박스)가 공연 러시가 한창인 연말 무대에서 <판소리 쑛스토리3: 현진건 편>(2025.12.19-12.20.,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단편소설을 판소리로 옮겨 새로운 말맛과 리듬감을 입혀 전달하는 놀애박스의 ‘판소리 쑛스토리’ 시리즈의 세 번째 무대로, 전작 무대에서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단편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탐색했다면 이번에는 한국 문학으로 시선을 돌려 현진건의 세계 속 근대적 인간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운수 좋은 날>, <그립은 흘긴 눈>, <정조와 약가> 세 편이 판소리로 재탄생했다.

먹지 못한 설렁탕, 운수 좋은 날
놀애박스가 선보이는 무대는 바탕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판소리 공연이나 분창(分唱)을 통해 연극성을 강화하는 창극과는 다른, 판소리가 중심에 놓이는 음악극이라 할 수 있다. 작중 중심인물이 아닌 조연 등의 인물은 앙상블을 멀티 롤로 활용해 무대에 다양성과 활기를 불어넣고, ‘떼창’으로 명명한 ‘함께 부르는’ 형식으로 분창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낸다.
앞서 두 번의 단편 무대가 1인극을 뼈대 삼아 앙상블을 추가한 형식으로 꾸며졌다면 세 번째 무대는 1인극과 다인극을 오가는 입체적인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도 박인혜가 작창·극본·연출을 맡은 극은 더욱 정교해진 짜임새로 완성도를 높였고, 음악그룹 나무의 최인환은 이번에도 풍성한 음악으로 극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켜냈다.
공연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은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다. 황지영이 이끌어가는 1인극으로 진행되는 공연은 원작에서와 같이 김 첨지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노동자인 인력거꾼 김 첨지는 “재수가 옴 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상황이다.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달라는 아픈 아내의 부탁을 뿌리치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루 종일 비가 추적거려 인력거를 달리기엔 나쁜 날씨지만, 신기하게도 오늘따라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드물게 큰돈을 벌었으니 곧장 집에 들어갈 법도 하지만 김 첨지는 친구 치삼을 불러 선술집으로 향한다. 인력거가 집에 가까워지면 걸음이 무거워지고 집에서 멀어지면 걸음이 가벼워진다는 서술처럼, 아내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는 그는 집으로 돌아가 목도하게 될 비극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애쓴다.
김 첨지의 비극은 인력거를 끌고 크지 않은 무대를 누비는 황지영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 관객들은 그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김 첨지의 심리에 감응한다. 처연한 음악과 어두운 조명은 겨울비가 내리는 경성의 풍경인 동시에 김 첨지의 불안과 절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기호이기도 하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전 국민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유명한 대사를 중얼거리는 순간은 관객들에게 배우 황지영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중요한 장면이다. ‘판소리 쑛스토리’의 두 번째 무대 중 <29호 침대>에서 국극 배우로 성별화된 전쟁의 비극을 선보였던 그는 국극 배우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듯 배우 황지영의 새로운 얼굴을 꺼내 보이며 백여 년 전 김 첨지의 비극을 오늘날 관객들에게 진정성 있게 설득한다.

사랑보다 무서운 빚, 그립은 흘긴 눈
두 번째로 만나는 인물은 <그립은 흘긴 눈>의 기생 채선이다. 1924년 발표된 이 작품에는 한 해 전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강명화-장병천 연애사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경성의 유명 기생 강명화와 대구 갑부의 외아들 장병천이 사랑에 빠져 백년해로를 약속했지만, 장병천 집안의 반대와 세간의 비난 속에 생활고를 겪다 두 사람 모두 음독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건으로, 이들의 비극적인 연애사는 소설과 노래 등으로 활발하게 재창작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들의 비극을 충실히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 여타 작품과 달리 현진건은 살아남은 기생 채선의 눈으로 연애사를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채선은 권번의 인기 기생이지만 그렇듯 뭇 남성들을 상대해야 하는 생활에 지쳐 있던 참에 마침 자신에게 반한 부잣집 도련님의 첩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친 연애는 생활고로 이어지고, 빚에 몰리는 생활을 견디지 못한 도련님은 채선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한다.
비극은 이 제안이 빈궁해진 연애의 극적인 한 장면이라고만 여긴 채선의 낙관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이 같은 생활고를 처음 겪어보는 도련님의 비관이 엇갈린 데서 비롯된다. 장단을 맞춰주느라 아편을 입에 넣기만 한 채선과 달리 도련님은 아편을 진짜로 삼키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채선을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그가 이미 삼켰을 아편을 토해내도록 시도한다. 하지만 채선이 아예 아편을 삼킨 적도 없다는 걸 알게 된 도련님은 애정이 있던 자리에 원망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다. ‘그립은 흘긴 눈’은 도련님이 죽어가던 순간 느낀 채선의 애상이 녹아 있는 제목이다.
박인혜는 공연 리플릿에 실린 창작자의 글에서 근대 소설 속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여성 주인공들 가운데 채선의 ‘팔딱팔딱 뛰는 욕망’과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모습에 이끌렸다고 밝히고 있는데, 채선은 과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과 예술 속에서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고결한 임무를 부여받는, ‘죽은 여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강명화를 포함해 많은 여성들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 파국으로 치달을 때 채선은 드물게 사랑을 뒤로하고 스스로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사랑이 죽음을 불사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현진건보다 70여 년 앞서 플로베르가 엠마 보바리에게 빚에 몰려 자살하는 결말을 준 것과 달리 현진건은 채선이 아니라 도련님에게 그 역할을 넘긴다.
<운수 좋은 날>처럼 <그립은 흘긴 눈>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과 회피하던 죽음을 뒤늦게 응시하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품의 톤은 매우 다르다. 그리고 ‘판소리 쑛스토리’의 무대는 이를 더욱 과감하게 비틀어 보여준다. 박인혜의 1인극으로 진행되는 듯하던 공연은 도련님이 채선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하면서 돌연 분위기가 바뀐다.
무대를 정비하러 잠시 등장한 줄 알았던 남성 스태프가 그대로 눌러앉아 도련님을 연기하며 공연을 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시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 4의 벽을 깨는 것은 판소리 바탕 무대의 한 특징이긴 하지만 이처럼 출연자와 스태프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을 지우는 것은 도련님에게 닥친 비극의 무게를 경감시키고 채선을 향한 시선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든다. 이 같은 연출로 채선은 연인에게 빚을 지우고 자살을 방조하기까지 한 악녀에서 벗어나 악녀를 연기하는 화자로 위치가 옮겨진다. 스태프의 개입이 비극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채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박인혜의 연출의 묘가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편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정조와 약가
세 번째 무대인 <정조와 약가>는 앞서 보여준 1인극이 아니라 다인극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등장인물은 아픈 남편과 그를 구완하는 아내, 명의로 소문이 자자한 의원 최 주부다. 약값을 치를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야멸차기 짝이 없는 최 주부가 남편의 병을 보아달라고 읍소하는 여자의 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다.

“땀방울이 맺힌 발그레한 얼굴, 착 달라붙은 앞섶으로 뚜렷이 드러난 가슴의 윤곽, 한 움큼에라도 쥐어질 듯한 가는 허리” 등으로 묘사되는 여자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 때문이다. 환자가 있다는 여자의 집으로 향하는 길, 땀에 젖은 그의 모습에 욕정을 느낀 최 주부는 여자를 겁탈한다. 그러나 여자는 저항하지도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아 도리어 최 주부만 민망해진다.
알고 보니 부부가 약값 대신 준비한 것은 아내의 정조였다. 최 주부가 여자를 따라나설 때부터 내심 기대하고 있던 바였지만 여자의 집에서 아픈 남편을 돌보는 동안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동침하는 아내도, 한술 더 떠 잘했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아내를 치하하고 위로하는 남편도 그저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다. 열흘간의 치료를 마치고 그들의 집을 떠나며 최 주부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것들은 정조도 질투도 모르는 모양이지!”라고.
다인극으로 전개되는 공연은 그야말로 캐릭터성의 향연이다. 우선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무심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맡은 이예린은 그가 노래 잘하는 소리꾼임은 물론 탁월한 배우이기도 하다는 걸 증명했다. 노래 가사에서 싱그러운 젊은 육체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이예린의 모호한 표정과 아련한 울림을 주는 목소리, 다소 경직되어 있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낯선 존재감을 아내에게 부여한다. 이 같은 낯선 감각은 ‘정조로 약값을 치르는’ 불편한 이야기와 거리를 벌리며 관객들이 아내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최 주부 역의 이해원은 이 무대에 ‘이야기’라는 안전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일등공신이다. 최 주부라는 탐욕적인 인물에 내재 된 위협이 이해원이라는 여성 소리꾼을 통해 중화되면서 관객들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정조와 약값이 교환되는 이 불편한 현장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안경과 의상 등 그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외관과 과장된 연기는 최 주부가 무대 위 인물이라는 믿음을 불어넣어 저기 어딘가로 언제든 사라질 것 같은 이예린의 위태로운 부유를 지금 이곳에 고정시켜 놓는 닻 역할을 한다.
황지영은 아픈 남편 역을 맡아 김 첨지에 이어 다시 한번 식민지 남성의 무능과 좌절, 순응과 체념을 보여주었는데, 힘을 뺀 연기로 이예린을 받쳐주며 극에 섬세한 결을 더했다.

‘근대적 개인’이 비춰낸 우리의 현재
‘한국 단편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현진건은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에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특히 단편소설의 형식을 정제시키고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동하던 과도기를 살아내야 했던 지식인의 무력감과 민중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개인의 욕망과 현실의 충돌을 경험하며 그로 인한 사회적 비극으로 치닫는다.
현진건이 단편 창작에 진력하던 1920년대는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진행되었던 3.1운동이 무력에 의해 강제 진압되며 그로 인한 비관과 절망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제국주의 타도와 노동자 해방의 기치를 올린 사회주의가 대안적 이념으로 힘을 얻는 한편 자본주의의 논리가 사회 전반 구석구석을 깊숙이 파고들던 시기이기도 하다.
놀애박스의 이번 공연 역시 근대적 개인과 ‘돈’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공연은 이들 세 작품의 핵심 키워드를 ‘근대적 개인’이라고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작품 속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결혼을 앞두고 예비부부의 경제력과 스펙을 견주며 이 정도면 ‘급’이 맞는 결혼인지, ‘반반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임신과 출산 부분에서는 어떻게 협의해야 하는지 같은 질문이 올라오며 결혼과 관련한 토론이 끝없이 벌어진다.
한편, 신문 사회면에서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살해한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태의 ‘동반자살’을 발견하는 일도 드물지 않으며, 심지어 가족 살해 후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혼자만 살아남아 재판에 넘겨지는 후일담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각자의 사정은 분분하지만 남성의 욕망과 여성의 육체가 교환되는 거래는 강남의 대형 클럽부터 ‘오피방’ 같은 변종 성매매 시장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파고 들어가다 보면 모두 ‘돈’으로 수렴된다.
그러니 <판소리 쑛스토리3: 현진건 편>을 보고 난 우리는 다시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놓여 있던 현진건의 시대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 G20 경제강국이 된 이 시대에 ‘돈’은 어떻게 우리의 가족과 생명과 애정 관계 속에 파고들며 인간의 존엄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그로 인해 일상과 윤리는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그 시대와의 거리를 가늠케 하며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다시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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