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6-1 (2026.2.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_ ©byone ©김소라 여성농악 안녕평안굿

<안녕, 평안굿>은 여성농악에 뿌리를 둔 작품이다. 농악은 본래 연희에 근거한 장르이다. 마당에서 공연되는 여성농악이 무대에 옮겨왔을 때, 안무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안무가 유재성은 이와 관련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음에 분명하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연희 속의 춤언어를 제대로 살렸다고나 할까.
무대 위, 연희자와 무용수의 식별법
공연무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대에서 연희자와 무용수를 대번에 구분한다. 연희꾼은 하체가 매우 안정적이다. ‘땅을 딛는 힘’이 전달된다. 그게 매우 자연스럽다. 따라서 연희꾼의 동작은 매우 편안하다. 투박하면서 텁텁한 느낌이 살아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간 구성 및 인지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다. 자신에게 익숙한 동작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무용수는 상대적으로 공간 구성 및 인지 능력에서 앞선다. 익숙한 동작보다는 새로운 동작을 향한 갈망이 느껴진다. 무용수는 연희자에 비해서 하체의 안정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원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전통춤계의 지난날 거장의 춤을 보면 하체를 의식하면서 춤을 추진 않지만, 하체의 안정감이 저런 춤사위를 가능하게 했음을 발견한다. 지금 전통춤은 하체의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페티코트를 겹으로 입은 상태에서의 움직임은 더욱 하체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춤이 가능한 건, 역시 전통춤의 무용수가 대체로 코어 근육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하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김소라 연출 X 유재성 안무, 이상적 결합

<안녕, 평안굿>에서 유재성의 안무는 연희의 강점을 살리면서, 춤의 동작적 특성을 그 안에 잘 이식시킨 성공사례라고 생각한다. 유재성은 <안녕, 평안굿>(김소라 연출)이 어떤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춤 작품이 아닌 타 장르의 안무를 할 때, 안무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안무가의 입장으로 안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연출가의 입장으로 안무하는 경우다. 전자는 동작의 완성도와 개성을 앞세운다. 후자는 장면 전체의 의도와 흐름을 우선한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겠으나, 유재성은 확실히 후자에 속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연출이 각 장면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요구를 잘 풀어냈다.
이제 안무를 뷔페형과 정식(定食)형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런 용어는 다소 경솔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기에 사용하려 한다. 어떤 안무는 뷔페형이다. 볼거리는 많고 풍성하다. 공연 당일 현장의 만족도는 높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나면 무엇이 남았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이 반대의 안무는 정식형이다. 유재성이 바로 이렇다. 어떤 동작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확실하게 관객이 기억할 수 있는 동작이다. 가짓수는 많지 않아도 정성스럽게 차린 상차림과 통하는 안무다. 말을 조금 달리하면 맛 자체보다는 영양가에 치중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안무는 ‘보여주며 자극하는’ 안무라기보다는, ‘느끼면서 기억게’ 안무’였다. 공연을 본 지 몇일 됐으나, 나는 지금 그 동작들이 뚜렷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전통에 바탕을 두고 현대화 작업을 할 때, 대개 ‘새롭고, 빠르고,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고 있다. 유재성은 달랐다. 그는 연희자와 작업을 하면서 점차 ‘연희의 장단과 그들의 호흡이 몸에 스며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무적인 동작과 순서, 구조를 제시하되, 동작을 주입해서 그들에 의해 박제되지 않기를 바랐다.

‘땅의 맛’을 느끼게 하는 안무
<안녕, 평안굿>에서 유재성의 안무를 보고 내가 끌린 이유는 무엇일까. 연희자 특유의 발의 안정감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땅의 맛‘이라고 표현했다. 유재성은 ‘발의 스텝’을 중심으로 새로운 언어를 찾아보았고, 기존의 연희적 동작의 언어를 바꿔보기도 하였다.
연희의 동작은 거의 모두 곡선 지향이다. 그러나 유재성은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 듯 싶다. “오금에 전해지며 팔자를 그리고, 둥근 에너지의 맛의 반대되는 직선적 움직임과 각을 잡고 존재를 뽐내는 동작”이 매력적이었는데, 유재성은 ‘여성농악’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강한 도시적 여성상’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막 마다 안무가 색다르다
이 작품은 오프닝을 포함해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막 마다 안무의 의도가 명확하게 객석에 전달되었다. 여기서 ‘연출의 의도’와 ‘안무의 의도’가 분리되지 않는다. 안무의 의도는 곧 연출의 의도이며, 연출의 의도는 작품 전체의 방향이었다. 유재성의 안무는 장면을 설명하지 않았다. 안무가 안무를 낳는다고나 할까. 안무에 안무가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고나 할까. 이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대개 공감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앞의 뷔페형과 정식형과도 연관되지만, 이 공연이 ‘움직임의 질’을 생각하게 그렇다. 일반적으로 연희는 ‘움직임의 양’이 많은 대신, ‘움직임의 질’이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당이라는 공간, 즉흥성과 흥의 논리가 강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연출 및 예술감독 김소라와 안무가 유재성이 만들어낸 결과는 분명 달랐다. 이 작품은 연희의 에너지를 유지한 채, 움직임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어떤 한 부분에서 동작을 계속 바꾸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어떤 한 동작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그러면서 그 동작을 관객들이 마음으로 따라할 수 있게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 공연의 시작부터가 그랬다. 객석에서 등장한 연희꾼들은 객석에서 관객들의 옆에 존재했다. 그러면서 손동작을 해나갔다. 이 손동작은 차츰차츰 번져가면서 객석에 있는 많은 관객들이 따라하게끔 만들었다. ‘동작적 이입’ 혹은 ‘정서적 이입’이라고나 할까. 배우에게 이런 말이 있다. 무대에 등장을 해서 1분에서 3분 이내에 관객을 무장해제 시켜야 한다고. 이 공연이 오프닝이 딱 그랬다. 이런 동작의 전달자는 무대에서 활동하는 11명의 연희꾼 (연희 6명, 무용 3명, 소리 2)이겠지만, 그 배후에 유재성의 안무가 있었을 거다.

<안녕, 평안굿>에 새롭게 해낸 5가지 성취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이 공연에서 ‘안무’와 연관해서 기존의 연희공연과 다르게 성취한 것은 무엇일까. 대략 네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시선 처리다. 연희는 마당예술에서 출발했기에 시선이 분산되거나 느슨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무용수들의 시선은 분명했고, 그 시선은 관객을 향해 열려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무대위의 예인이겠지만, 계속 뭔가 아이 컨택과 같은 친근감과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관객들은 일반농악과 다른 ‘여성농악’ 특유의 살가움 같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둘째는 몸가짐이다. 거기서 느껴지는 적당한 긴장감이다. 보통 연희 공연에서는 어딘가 느슨하고 어수선한 기운을 받는다. 때로는 그것이 관객을 향한 무성의한 태도처럼 보일 때도 있다. <안녕, 평안굿>에선 연희자들의 몸에서 ‘행복한 긴장감’이 발산되는 것 같았다. 긴장하되 굳지 않았고, 즐기되 흐트러지지 않았다.
셋째는 코어 근육이다. 춤꾼이라면 코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공감할 것이다. 같은 몸을 사용한다 치더라도 연희는 춤에 비해서 코어근육의 중요성을 덜 인식하는 듯싶다. <안녕, 평안굿>에서 유재성은 무대 위의 연희자에게 코어의 중요성을 역설한 듯싶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개별적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움직임의 시작과 끝이 몸의 중심에서 분명하게 감지되었다. 동작 전체에 관통하는 밀도(密度)는 곧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강하게 받게 해주었고, 이것이 그대로 관객과의 친밀도(親密度)로 연결되었다.
넷째는 ‘발’ 동작의 세련됨이다. 내가 <안녕, 평안굿>을 크게 인정하며 글로써 알려지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간 연희 공연에선 마당의 공연임에도 발동작이 정돈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적이 많았다. 연희자들은 손에 악기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발동작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고, 때론 각자의 개성에 맡긴 인상도 풍긴다. <안녕, 평안굿>은 달랐다. 야외 연희 공연에선 오히려 땅을 밟는다는 생각을 덜 했는데, 프로시니엄 무대 위의 연희꾼들이 지금 땅을 밝으면서 땅의 기운을 느끼면서 뭔가를 마치 수도자처럼 뭔가를 수행(修行)하고 있단 생각마저 들었다. 때로는 욱신욱신, 자신의 몸을 통해서 저 땅 밑은 두드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겅중겅중, 땅의 기운을 받아서 오히려 위로 상승하는 느낌을 받았다. 통통거리는 느낌도 있었다. 이건 20대가 중심이 된 여성농악의 분위기를 가장 많이 느끼게 했다. 비유컨대 이건 마치 걸그룹의 생기발랄함이 한국 전통연희의 필터링을 거쳐서 여성농악의 연희꾼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게 이식(移植)이 된 것 같았다.
다섯째는 ‘시간의 경과’를 다루는 방식이다. 사실 이는 내가 공연을 볼 때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느낀 건 아니다. 공연을 보고 난 후, 프로그램북과 연출자와 안무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김소라 연출은 이 공연을 해에서 시작해서 달까지 이어지는 공연으로 만들어냈다. 오프닝과 클로징을 통해서 그러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유재성 안무의 공연을 살핀다면, 그의 안무에서도 ‘시간의 감각’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이 공연의 무대 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원의 느낌을 살린 조명이 비추었다. 유재성의 안무를 통해서 연희꾼 2인이 돌고 있는 모습이 마치 초침처럼 균등하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런 감각을 예전에 받을 걸 기억한다. 이 감각은 황병기 작곡의 가야금 독주곡 <시계탑>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라는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서도, 사람과 삶의 생기를 전해준다고나 할까.
유재성이 보여준 ‘소심한 과감함’
유재성이라는 안무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는 ‘소심한 과감함’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안녕, 평안굿>에서의 안무는 분명 ‘연희 안에서 존재해야 할 춤’이라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선 모든 장면에서 연희의 움직임과 호흡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런 대전제 하에서 유재성은 춤적인 요소를 최대한 집어넣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여지고 느껴졌다.

유재성은 결코 자신이 안무한 작품에서도 화려한 동작이나 현란한 기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듯싶다. 그러나 마치 소심한 듯, 무심한 듯싶은 진행 속에서도 그만의 매우 영특하고 때론 발칙하게(?) 느껴지는 동작이 보여졌다. <농부가>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연희꾼의 여성 걸그룹과 같은 자리매김이 그렇고, <채상소고놀이>에서 관객을 설레게 만드는 붉은 색의 윤무(輪舞)가 그렇다. <징놀이>에서 담겨있는 징이라는 물성(物性)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게 그러하다. 이 부분에선 마치 파문(波紋)과 같은 느낌이 전달되었다.
다시 부언하면, <농부가>는 남도민요로 소리꾼들이 도열해서 부르는 전형적인 노래다. 그 안에는 이미 나름의 동작과 발림이 존재한다. 기존의 <농부가>가 단전에 힘을 모아 안정적으로 뻗어 나가는 동작이었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실제 농부들이 모를 심을 때의 대형이 연상되었고, 무엇보다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한국춤 특유의 어깨춤과도 달랐고, 소리꾼들의 춤에서 종종 무시되던 어깨의 사용과도 다른 감각이었다.
이번 무대에서 <농부가>는 기존 농부가의 2026년 버전 혹은 여성농악(걸그룹) 버전과 같은 인상이 강했다. 이 부분을 이번 공연의 메인 송 & 메인 안무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유재성은 전통적인 연희적 의움직임과 오늘의 20대가 지닌 생기발랄함의 접점을 알고 있다. <안녕, 평안굿>은 여성농악의 현재를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과거의 여성농악에서 농악에서 어떤 것을 수용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의미부여 할 지를 현명하게 판단하고 있다. 생각과 논리의 중심에 연출 김소라가 있었고, 그것을 움직임과 감성으로 안무 유재성이 잘 풀어냈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