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5-2 (2026.1.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오프레임

지난해 나는 SNS에서 발레를 “절대성의 미학으로 질문을 봉쇄하는 장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나의 이러한 정의는 발레를 동경하는 사람들과 발레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과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제법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공연의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영화 〈국보〉가 그려내는 가부키의 세계가 예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제사에 가까운 것 역시 질문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에 기반한 오랜 역사성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예술 전반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지만 특히 한국에서의 발레는 서구 전통이라는 제국주의적 위력과 결합되어 그 봉쇄력이 더욱 강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컨템퍼러리 예술에서는 때로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질문 그 자체에 무게중심이 쏠리는 것과 달리 발레에서만큼은 여전히 ‘클래식 발레’의 안티테제로서 컨템퍼러리를 호명하는 것을 정체성으로 하는 작품들이 대다수인 것은 이 봉쇄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클래식 발레나 클래식 음악 등과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전통을 따르는 예술 장르, 그러니까 창작자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작품이 ‘유훈’으로 남아 있는 장르 앞에는 ‘클래식’을 붙이는 것이 공식 명칭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클래식’이라는 단어 안에 내재된 계급성과 서열화, 그리고 방금 이야기한 봉쇄력까지 아울러 생각한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레거시’ 예술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명칭일지도 모르겠다.


메타발레 안의 또 다른 메타발레
발레를 창작의 도구로 사용하는 안무가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윤상은의 작업은 매우 독특한 위치성을 갖는다. 그의 질문과 시선의 방향이 발레 내부를 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봉쇄력에 균열을 내는 윤상은의 질문은 종종 ‘왜 발레로 이런 작업을 하는가’라는 되물음을 마주해야 한다. 이 되물음은 사실상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전통으로 물려져 내려온 규범과 미학을 왜 따르지 않느냐는 준엄한 호통에 가깝다.
이러한 호통을 별 거리낌 없이 내지를 수 있는 것은 예술에서 흔히 시도되고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하는, 소위 경계를 넘는다거나 금기를 위반한다거나 하는 창작자의 도발과 실험이 발레에서만큼은 절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발언의 내용이 아니라 어조나 표현 방식을 문제 삼아 발언을 기각하려는 전술로 행해지는 ‘톤 폴리싱’과 정확히 같은 기제로, 이때 ‘왜 발레로 이런 작업을 하는가’의 질문을 던지는 관객 혹은 비평가는 향유자가 아니라 감시자로서 전통 규범의 수호자로 재정체화된다(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수호하는 것이 전통이 아니라 미학 그 자체라고 항변할 것이고 이 항변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전통의 수호에 복무하게 된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윤상은은 신작 〈메타발레: 즉흥, 구겨진 아티튜드〉(2025.12.20.-12.21.,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를 통해 이번에는 발레의 움직임 규범에 질문을 던졌다. 몸을 최대한 ‘팽팽하게’ ‘펼쳐’ 움직임을 완성하는 기존의 규범을 비틀어 몸을 ‘구기고’ ‘찌그러트리며’ ‘즉흥’에 도전한 것이다. 입을 모아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라는 기대감을 표하며 고혜주, 김민수, 김소혜, 임언주 네 명의 발레리나가 한자리에 모였다.
공연은 이들이 노트에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실은 매우 전복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시선의 객체로서 늘 응시의 대상이 되어 비평가들의 ‘글감’으로만 존재했던 발레리나들이 스스로 ‘쓰는’ 주체임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안무가나 리허설 디렉터 등 지도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이 장면에서 발레리나들은 공연의 사전 과정으로서 어제의 연습을 복기하고 오늘의 공연을 준비하며 그 모든 것을 오롯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는 윤상은이 공연으로 선보이는 ‘메타발레’ 안의 또 다른 ‘메타발레’라 할 수 있다.
즉흥과 비즉흥 사이, 찰나의 긴장
재밌을 것 같다는 처음의 기대와 달리 이들에게 ‘즉흥’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애써 구기고 찌그러트린 몸은 어느새 팽팽하게 펴지며 발레의 원래 동작으로 자꾸만 돌아간다. 그러니 이들이 시도하는 ‘즉흥’은 무용 공연에 익숙한 관객이나 비평가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방법론으로서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완성된 안무’라는 훌륭한 도구를 빼앗긴 이들이 몸에 각인되어 있는 움직임을 무작위로 추출해보는 즉흥 이전의 무언가에 가까우며, 안무로 확정된 것이 아닌 날것의 움직임을 표출하면서도(물론 관객들 눈앞에서 공연으로 선보이게 되는 시점에는 이미 날것 상태를 벗어난 확정된 안무이지만) 그 수행이 매끄러워 즉흥에서 흔히 기대되는 돌발적인 번뜩임을 드러낼 여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공연에서 가장 시선을 붙드는 것은 애써 몸을 구기고 찌그러트리고자 하는 무용수의 의지에 반해 기존의 팽팽하게 펼쳐진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몸의 관성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긴장감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연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쉬이 놓치고 마는 것이기에 관객들은 무용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공연은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동안 잠시 번득였다 사라지는 찰나의 긴장감과 이들을 쫓는 관객들의 숨죽인 응시의 긴장감 사이에서 미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즉흥으로 촉발된 긴장에서 비롯되는 무대와 객석 간의 소리 없는 대화가 아니다. 즉흥이 발생했다 무산되고 다시 시도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완성된 안무의 헌신적인 수행자로, 나아가 발레의 미학과 여성혐오를 동시에 대표하는 상징으로 존재했던 발레리나가 인간성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 무용수들은 자신이 발레 작품 속 수많은 장면 가운데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얼핏 들으면 춤과는 관련 없는 듯한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에 대해, 또 무용수가 아닌 일상을 영위하는 자연인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음식과 조리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발레리나’라는 주어
공연 리플릿에는 리서치 과정에서 나눈 무용수들 간의 대화가 일부 발췌되어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나는 내가 ‘발레리나’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발레리나’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정도 되어야”라는 문장이다. 누구의 발화인지 모를 이 문장은 윤상은이 〈죽는 장면〉을 준비하며 자하로바의 〈지젤〉 연기에 감동했던 어떤 순간과 공명한다.
발레 전공자라면 금세 고개를 끄덕이게 될 이 문장은 그저 특정 직업군을 가리키는 명칭일 뿐인 ‘발레리나’가 무용수에게는 어떠한 중압감으로 작동하는지, 그 특정 세계 내에서 무용수가 자존감과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인간’으로 존재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이다. 그리고 공연 후반부에 고혜주가 〈지젤〉의 매드씬을 연기하는 것은 앞서 무용수들이 나눈 대화 중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에 대한 응답이자 ‘발레리나’로 공명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임언주가 토슈즈를 벗어 던지는 장면은 윤상은이 이 작업의 전면에 내세웠던 ‘즉흥’에 대한 선언처럼 보인다. 매우 간단한 연출이지만 그동안의 무대에서 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맨발로 토슈즈와 수선 도구를 가지고 나와 토슈즈를 발에 꼭 맞게 신는 것부터가 발레 공연의 시작점이라고 웅변해 왔던 것을 한순간에 뒤집는 장면이다.
나는 전작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의 리뷰에서 ‘발레와 발레가 아닌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윤상은의 작업에서 짚어야 할 것은 ‘발레가 아닌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발레가 아니라고 결정하는 것은 또 누구인지 주어를 찾아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윤상은이 ‘발레리나’라는 정체성 위에서 재구성한 이번 작업은 그 ‘주어 찾기’에 대한 하나의 유의미한 대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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