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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종말의 문턱에서 발견한 몸의 진화: 손영일의 <종말인가 진화인가>

공연비평

Vol.125-2 (2026.1.20.) 발행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손영일



예술에서 ‘종말’은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한 주장이 대표적이다.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은 예술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예술이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거대 서사(Grand narrative, meta narrative)가 끝났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팝아트와 개념미술에 이르러 예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철학의 단계로 넘어갔다. 예술이 자기 인식을 완성했으므로 ‘발전’이라는 역사의 서사는 끝났다는 것이다. 즉, 예술에서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종말’의 바탕에는 ‘진화’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런데 진화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발전이 아닌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다. 고대 신화나 종교에서 진화는 영혼이나 우주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상승과 변형의 개념이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성이 있다. 끝을 향해 개선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계승이라는 다윈의 진화 개념은 이 작품에서 종말보다 더 중요하다. 종말은 하나의 매듭에 불과하며, 종말과 진화는 삶과 자연에 관한 통찰이라는 것이다.




지난 12월 17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손영일의 <종말인가 진화인가>(안무·연출 손영일, 작가 손미리)가 무대에 올랐다. 팸플릿의 묵직한 무게감만큼이나 작품은 관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는 기술의 시대, 특히 인간의 고유 영역을 파고드는 AI(인공지능)의 위협 속에서 흔들리는 ‘나(인간)’의 정체성을 몸의 언어로 성찰했다. 기술 발전이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AI가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감성 깊이와 복잡성을 춤으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예술적 시도였다.


시작은 감각적이다. 샤막에 장미가 피고 시드는 영상이 빠르게 펼쳐지고 레이저 포인터가 기계적 가상공간을 구축한다. 이는 인간의 감성과 대조되는 차가운 기술적 환경을 시각화한다. 무대 중앙에는 세 면의 계단과 그 위에 놓인 회전문이라는 큰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구조물은 중요한 무대 장치이면서 하나의 규칙처럼 자리 잡고 작품의 핵심 메타포인 ‘반복’을 구체화한다. 여기서 ‘계단’은 인간이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생의 노동이자, 기술적 발전이 지향하는 수직적 성취를 동시에 상징한다. 회전문은 파괴와 재생, 소멸과 부활이 반복되는 경계의 통로이다. 안무가는 이 문을 통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 모습을 교차시키며, 기술이 인간 삶에 어떻게 통합되고 변형되는지를 탐구한다. 회전문 위에 투사된 흐릿한 영상은 '디지털 복제물' 혹은 '미래의 AI'를 상징하며, 그 앞에 선 실제 무용수의 육신과 중첩된다. 이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혼돈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데이터화된 그림자와 어떻게 조우하고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를 시각적 레이어로 풀어낸 지점이다. 계단이 가진 선형적 반복과 회전문의 원형적 반복은 서로 충돌하며 에너지를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데, 이는 다윈식 진화론의 ‘변화를 동반한 계승’을 무대 위에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인간 내면의 여정을 따라간다. 제1장 ‘소실(消失)’에서 9명의 무용수는 일사불란하고 반복적인 군무를 통해 외부의 기대와 사회적 기술에 뒤덮여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무용수들의 하얀 정장은 기술 시대의 규격화된 외피처럼 보이지만, 격렬한 움직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붉은 안감은 억눌린 인간의 혈색이자 생명의 본능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때로 기계적이고 정교하며, 개별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거대한 알고리즘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미세하게 어긋나는 근육의 떨림과 숨소리는 소멸해 가는 인간성의 마지막 저항처럼 느껴진다.


제2장 ‘결실(結失)’과 제3장 ‘탐색(探索)’으로 이어지는 군무는 역동적이다. 사라져 버리는 꿈을 담은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이 충돌하며, 잃고 잊히는 자신을 찾으려는 처절한 몸짓이 이어진다. 앞 장보다 더 격렬해진 동작은 미래의 자신을 탐색하며 내면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에서 군무는 복잡성을 드러내며 성장과 깨달음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단독자의 뒷모습은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마주한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보여준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그를 비추는 빛인 동시에 그를 고립시키는 벽이 되어, 진화의 문턱에서 겪는 내면의 진통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의 미학으로 극대화한다.


제4장 ‘수용(受容)’에서 무대는 비로소 모든 갈등을 포용한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기술의 변화를 삶의 내면 깊은 곳까지 성찰하며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더 이상 기계적이지 않으며, 기술과 인간이 서로를 파괴하는 대신 창조적 파트너로서 조화롭게 공존해야 함을 극대화한 몸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으로 증명한다. 희망은 말로 적힐 때보다, 호흡의 간격이 달라질 때 더 분명해진다. 몸이 더 이상 기계적 정확성을 흉내 내지 않을 때, 관객은 비로소 ‘인간성’이라는 단어를 설명이 아니라 촉감으로 이해한다. 종말이 매듭이라면, 이 무대는 그 매듭을 풀지 않고, 매듭을 다른 방식으로 묶는 법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내레이션은 계단에 앉은 배우(이대희, 손미리)에 의해 발화되는데, 이는 춤과 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내레이션의 내용은 소음에 가려지거나 파편화되어 전달되는데, 무용수들의 동작은 이 발화 내용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춤은 춤대로, 말은 말대로 각자의 궤적을 그린다. 이러한 불일치는 작품의 주제인 조화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언어(내레이션)가 기술적 논리와 이성을 대변한다면, 춤(몸짓)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감성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춤이 내레이션을 따르지 않는 것은 기술(AI)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 고유의 주체성을 선언하는 행위로 보인다. 둘 사이의 간격이 만들어내는 풍성한 행간은 관객에게 ‘우리는 종말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손영일의 이번 무대는 몸으로 세상을 기록하고 시대를 담아내려는 시도이다. ‘종말’이라는 문턱에서 춤이라는 ‘진화’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 작품은, 기술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팸플릿의 문구처럼, 이 무대는 질문의 답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었으며, 그 여정 끝에 남은 것은 기술과 인간이 어우러진 희망의 몸짓이었다. 암전 직전, 거대한 빛의 고리가 무대를 감싸안고 무용수들이 그 빛의 파장 안으로 잦아드는 광경은 이 작품이 도달한 최고의 미학적 지점이다. 손영일은 '종말'이라는 두려운 매듭을 풀지 않고, 그 매듭 위에 새로운 빛의 원을 그림으로써 우리 시대의 춤이 나아가야 할 진화의 방향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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