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5-1 (2026.1.5.) 발행
글_ 이상헌(춤 평론가)
사진_ 박병민(사진가)

모든 이야기를 큰 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야 오히려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 내용과 화자에 따라 적절한 목소리 크기가 있다. 새삼 이런 생각을 들게 한 박소희 안무·연출작 〈그랜니코드〉가 지난 12월 20일 부산 시민공원 작은 갤러리 공간에서 관객 16명과 오붓하게 펼쳐졌다. 작품에 참여한 사람을 소개한 부분부터 재미있다. 움직임 리서치 및 출연 배진아(나), 전시 작품 제작 전진수(할머니), 사운드 구성 및 디렉션 유자적, 비주얼 디렉터 궁다빈(출연도 한다), 무대감독 강건, 무대 보조 및 음향 OP 배유빈(출연도 한다), 조명 디자인 이하슬, 홍보 정승환, 사진 박병민. 여기서 모두를 소개하는 것은 규모가 큰 공연에서 보이지 않는 스태프가 모두 보이고, 역할도 드러나는 따뜻한 가내수공업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내수공업 같은 따뜻함은 단지 정서적 수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제작의 과정 자체가 보이도록 열어둔다. 비주얼 디렉터와 사운드 디렉터가 출연한다는 사실, 전시 작품 제작자가 ‘할머니’라는 역할로 명명된 사실은 무대 밖의 노동이 무대 안으로 자연스레 들어오는 방식이다. 그 순간 관객은 어떤 장면을 누가 만들고 있는지를 감지한다. 우리가 보통 공연장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완성도의 이면이 이 작품에서는 다정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랜니코드〉의 친밀함은 가족 서사의 친밀함뿐 아니라, 제작 공동체의 친밀함까지 함께 품는다.


그랜니코드는 Granny(할머니)와 Code의 합성어로 할머니로부터 전해 내려온 삶의 감각, 습관, 사랑의 방식들이 내 몸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정서적 암호를 뜻한다. 모계로 전해 내려온 문화적 DNA인 셈이다. 작품 모티브도 할머니의 뜨개질,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의 작은 정원, 커다란 대추나무 같은 풍경과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실을 엮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놀랍게도 이 모두 작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나’의 현재 공간까지 더해졌는데, 조밀하지는 않고 기억의 파편들을 성기게 나열했다. 기억은 필름 기록과 달라서 전체가 이어지듯 남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이 작은 갤러리 공간에 들어섰을 때, 마치 ‘나’의 기억을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연 시작 전에 관객에게 공간의 설치물을 감상할 기회를 준다. 관객은 ‘나’의 유년 시절 사진을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와 주고받은 편지를 읽을 수 있고, 할머니의 뜨개질 도구와 할머니의 옷 등 현재와 기억으로 나눈 공간을 돌아다니며 천천히 ‘나’의 기억 속 한 부분으로 스며들게 된다. 사진과 편지와 옷과 도구는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세우는 재료가 된다. 특히 편지는 인상적인 장치다. 편지는 말과 말 사이의 시간이 종이에 눌려 있는 형식이고, 그 눌린 시간이 관객 앞에서 다시 펴지면서, ‘나’의 시간도 함께 펴진다. 이때 움직임은 편지를 읽는 몸짓이면서 동시에, 편지로는 다 말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 말하는 몸짓이 된다.
어쩌면 엉성하게 보이는 모든 장치는 잘 짜인 연출이다. 박소희는 그동안 다양한 성격의 작품을 연출·안무하면서 작품 성격을 깊이 있게 반영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공간, 서사, 음악과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특히 감각적인 부분은 작품 형식을 ‘오래된 뮤직드라마’로 설정한 점이다. 오래된 뮤직드라마라는 명명은 후렴처럼 돌아오는 선율과 반복되는 동작을 통해, 기억이 직선이 아니라 반복의 회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형식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움직임은 드라마 대사를 대신한다. 움직임은 대사보다 행간이 넓어 관객 감성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 관객은 이 행간에서 자신의 추억 조각을 대입시키기도 하고, 극 중 화자인 ‘나’의 추억에 공감하기도 한다. ‘나’가 공간을 돌아다니며 기억을 더듬을 때 관객 사이를 지나가면서 가벼운 접촉을 하는데, 관객과 어깨나 손등이 스칠 때, 공간의 감성 온도가 미세하게 변한다. 접촉은 위로의 제스처라기보다, 혼자 있던 몸이 ‘타인의 체온’을 확인하는 짧은 증거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외로움은 비장한 독백으로 번지지 않고, 관계의 온도를 더듬는 감각으로 옮겨가며 재가동한다. 관객은 ‘나’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돌리고 일어서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관객의 감성은 작품의 요소로 적극 활용돼 공간과 서사의 밀도를 높여갔다.


떠났던 방으로 끌고 온 캐리어는 이별과 귀환의 물건이다. 바퀴 달린 물체 하나가 공간을 가르며 들어올 때, 관객은 곧바로 ‘이 사람의 현재’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움직임들은 거창한 서사적 제스처가 아니라, 몸에 박힌 습관이다. 캐리어를 여는 순간, 입었던 옷, 사물과 함께 오랜 추억이 반짝이며 와르르 쏟아진다. 아마 외로움이지 싶다. 돌아왔지만, 내가 바라던 따뜻함이 없는 곳에서 느끼는 외로움 말이다. 그런데 〈그랜니코드〉는 외로움을 비장하게 키우지 않는다. 외로움이 커지기 전에 외로움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나’의 추억 보듬기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슬픔을 크게 말하지 않고도 삶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감각들을 몸으로 호출하는 기술. 이 작품이 작은 목소리로 큰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서 ‘추억’은 단순한 회상에 머물지 않고, ‘감각의 재가동’이다. 몸속에 가라앉았던 기억이 반짝이는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이 작품의 드라마는 사건의 연쇄라기보다 감각의 연쇄로 진행된다. 캐리어에서 반짝이가 쏟아지는 순간이 귀환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라면, 그다음은 그 안의 사물들이 하나씩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다.
〈그랜니코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내 몸 안에 남아 있는 정서적 암호는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다른 암호를 갖고 살아가지만, 그 암호가 대개 모계의 손길, 반복된 노동, 말보다 앞선 돌봄의 리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비슷하다. 이 작품은 그 리듬을 복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복원된 리듬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를 묻는다. 과거의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몸을 움직이는 코드가 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을 조용히 보여준 뒤, 작품은 관객을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 돌려보냄이야말로 이 작품의 결론처럼 느껴진다. 관객이 갤러리 문을 나서는 순간, 각자의 캐리어, 각자의 방, 각자의 반짝임이 문득 생각난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박소희는 그렇게 남는 방식을 안다. 이 작품은 규모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가 공연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작은 갤러리에서 조용히 증명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짙게 만드는 연출 감각이란, 결국 관객의 마음속에 조용히 불을 켜는 일이다. 그렇게 켜진 작은 불빛은, 앞으로도 한동안 꺼지지 않을 것 같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