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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시간을 견디는 몸: 〈거장의 숨결〉을 통해 본 춤, 음악, 인간

공연비평

Vol.125-1 (2026.1.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_ 전강인(포토그래퍼) 출처 국립극장페이스북



1. 거장도 피할 수 없는 성패와 공과


오늘날의 많은 춤은 장치와 연출을 잘 활용하면서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다. 감성과 감각이 매우 수준이 높으나, 그 작품을 가능하게 한 이성과 지각에 대해선 때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전면은 휘황하고 화려하나, 이면은 공허하고 빈한하다. 인간을 향한 성찰이 느껴지거나, 인문학적 토대가 튼튼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거장의 숨결〉에서 만난 ‘거장의 안무’는 그렇지 않았다. 그 춤에서 사람이 보였다. 그 춤에서 음악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화두 삼아서, ‘춤’이란 무엇이며 춤에서의 거장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게 참으로 고귀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장은 ‘무결점의 예술가’일까. 아니다. 거장 또한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겪었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보다 더 겪었을지도 모른다. 거장의 인생에도 예술적인 성패(成敗)와 사회적인 공과(功過)가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그들을 거장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일까? 그러함에도 그들을 거장으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장의 숨결〉의 네 작품을 보면서 겹치는 건, 이런 인간사의 단면이 아니다. 거장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이다. 〈거장의 숨결〉에선 거장을 거장으로 불러야 할 충분한 이유가 존재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들을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타당한 사유(事由)를 그들의 춤에 존재하는 사유(思惟)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거장이 만들어낸 작품의 가치는 여러 측면으로 파악할 수 있겠으나, 나의 이 글에서 가장 중시한 키워드 혹은 개념은 바로 ‘시간’이다. 〈거장의 숨결〉에는 거장이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이 글의 성격은 어떠한가. ‘시간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춤을 통해서 그들이 만든 작품 속의 시간과 실제 그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을 유추한 글이다.


2. 춤과 음악, 그리고 시간이라는 공통 언어


춤은 시각예술이고, 음악은 청각예술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예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둘은 모두 시간예술이다. 회화나 조각과 같은 공간예술은 한눈에 포착할 수 있지만, 시간예술은 다르다. 시간의 지속 속에서만 의미가 형성되며, 끝까지 보고 듣고 난 뒤에야 온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무용공연에서는 보통 시각적 춤과 청각적 음악이 공존한다. 따라서 춤공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춤과 함께 흐르는 음악’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춤과 음악을 동시에 이해하는 공통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이다. 춤과 음악은 모두 시간예술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춤은 음악을 동반하지만, ‘춤이 음악을 통해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특히 이번 〈거장의 숨결〉에선 더 그러했다. 춤이 음악을 매우 잘 다루었다. 이번 무대의 춤을 ‘거장의 안무’, ‘거장의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참 많다. 나는 그중에서 네 개의 춤에 공히 적용할 수 있는 일관적인 기준으로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거장의 숨결〉에는 네 개의 다른 춤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네 개의 다른 음악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각기 다른 ‘시간의 의미’를 만들어준다. 이 글은 이렇게 ‘춤–음악–시간’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셋을 연결하는 중심에 ‘인간’을 두고 쓴 글이다.


3. 견뎌내는 시간, 서로 다른 인간형


네 개의 춤에서 생성되는 시간은 저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무언가를 ‘견뎌내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네 개의 춤은 인생사의 무엇을 견뎌내고 있다. 그 견딤의 시간 속에서 음악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이 작품들이 적절한 음악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간의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시간을 통해 인문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 네 개의 춤에는 분명히 서로 다른 모습의 인간형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1) 배정혜 안무 〈Soul, 해바라기〉_ 그리움을 향해 가다


배정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Homo Desiderans, 흔히 ‘욕망하는 인간’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원래의 뜻도 그러하고, 이 작품의 맥락에서는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이라 옮기는 편이 정확하다. 라틴어 desiderare는 단순히 ‘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결핍을 자각하고 그 결핍을 향해 마음이 끌리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Soul, 해바라기〉는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이 작품은 안무가가 해외에서 만난 입양아들에게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입양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결핍은 무엇이며, 그 마음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 근원은 ‘한국’이다. 다만 그것은 ‘실제의 한국’이라기보다는, 지금의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과거의 한국’이자 ‘마음속의 한국’이다. 현실의 한국이 아니라, 모성(母性)과 연결된 이미 지나간 시절의 한국이다. 그러하기에 그건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Soul, 해바라기〉는 어떤 작품인가. “입양아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들을 다독이다가, 마침내 그들과 함께 놀이로 어우러지는 영혼의 춤판.” 이게 내 한 줄 평이다. 


이 작품의 음악은 한국의 민요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서양악기로 연주한 한국 민요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외국인이 편곡한 한국 민요이다. 독일의 재즈 그룹 살타첼로(Saltacello)의 음악을 모태(母胎)로 만든 음악이다. 이 춤이 서양악기를 선택했다는 건 ‘신의 한 수’다. 나는 국악을 무척 사랑하지만, 이 작품에서 만약 순(純)국악을 사용했다면 이러한 감흥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일까. 만약 전통 국악기로 연주된 민요였다면, 그 음악은 입양아들에게 오히려 너무 이그조틱(exotic)한 소리로 들렸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은, 그들에게 근원적인 그리움을 불러오기보다 오히려 거리를 만들 수 있다. 너무도 생소한 음향이기에 그렇다. 반면, 서양악기를 통해 펼쳐지는 한국적인 선율은 그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된다.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살아가는 입양아의 운명적 정체성에는 이런 음악이 부합한다. 이 음악은 입양아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음악은 한국 음악 그 자체가 아니다. 한국의 음악을 서양악기로 옮긴, ‘번역된 음악’이다. 이 음악 속에서 흐르는 시간 또한 나는 ‘번역된 시간’이라 생각한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원본과 번역은 동시가 아니다. 번역된 시간은 언제나 원본에 한 박자 늦게 도착한다. 


또한 번역은 원본과 똑같지 않다. 똑같아지려 하지만, 그건 완전하지 않고 어긋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 생각이 들지 않는가. 자신의 실제의 모습을 당시보다 더 지나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입양아이다. 이런 어긋남이 입양아가 살아온 시간이다. 입양아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모국어로 산 것이 아니라, 언제나 ‘번역된 삶’을 살아왔다. 그들에게 조국의 시간은 체험되지 않았고, 기억은 언제나 전해 들은 이야기로 존재한다. 서양악기로 연주되는 한국 민요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구조를 소리로 재현한다. 〈Soul, 해바라기〉의 춤은 이 ‘번역된 시간’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번역된 시간을 매우 존중한다. 이 춤에는 많은 동작이 존재한다. 그건 어쩌면 다양한 입양아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어쩌면 방식을 모르는 상태의 방식으로 시간을 몸으로 견뎌내며, 망설이고 돌아서고 머뭇거리는 동작을 한다. 서양악기로 연주하는 한국 민요는 그들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번역된 시간의 리듬’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작품이 말하는 Homo Desiderans, 곧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은 원본으로 곧장 돌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는 번역된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려는 인간이다.


〈Soul, 해바라기〉는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의 이야기이며, 음악과 춤은 입양아라는 정체성을 전제한 채, 그들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슬픈 듯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기쁘게’ 그려낸다. 이번 공연에서는 1막만 공연해서 아쉽지만, 2막에서는 입양아들의 축제를 보는 것 같다. 슬픈 듯 기쁘고, 기쁜 듯 슬픈 게 〈Soul, 해바라기〉라 하겠는데, 이건 입양아들이 지닌 심리적 이중성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2) 국수호 안무 〈티벳의 하늘〉_ 배경이 되어 초월을 향하다




국수호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Homo Orans, 몸을 통해 기도하는 인간이다. 국수호는 이를 매우 잘 그려낸다. 아마 이런 형태의 춤은 그가 최초이자 최고라 할 수 있다. “하늘에 다다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인간이 기도라는 의식을 통해서 땅에서 펼치는 하늘의 축제”가 이 작품의 한 줄 평이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몸을 세운다. 그 몸은 고난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몸이다. 언젠가 자신도 그런 역경을 딛고 일어나 하늘에 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으며 견뎌낸다. 그 몸은 땅의 기운을 받아 그것을 하늘에 전해준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영매가 곧 몸인 셈이다. 〈티벳의 하늘〉은 인류의 보편적인 제의(祭儀)를 다룬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은 보통 신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땅에 있는 존재인 인간은 늘 하늘을 향하고 있고, 제천의식의 정점은 하늘과 맞닿은 높은 지점에 놓인다. 그들은 인간이 신이 아님을 잘 안다. 인간은 결코 초월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렇기에 현재의 한계 속에서, 구원의 미래를 향해 기도하는 행위가 중요해진다.


이러한 내용을 표현하는 음악은 홍동기 작곡이다. 홍동기는 1990년대 무용 음악가로서 한 역할을 분명히 해낸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신디사이저를 중심으로 하며, 국악 그룹 ‘슬기둥’에서 활동한 이력답게 한국적인 음악 요소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훌륭한 음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이 음악은 자칫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음악’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다. 사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기억되지 않음’은 결함이 아니라, 무용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 결과다. 이 음악은 결코 서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장면 전환의 동력으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춤의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늘 서사와 분위기를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따라서 이 음악은 철저히 한 발짝 물러난 음악이다. 


결코 음악이 춤을 앞선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 음악은 회화로 치면 배경화에 가깝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춤 음악으로서 매우 적절한 선택이며, 그 결과 이 음악은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배경화된 시간’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배경화된 시간’이란 무엇인가. 〈티벳의 하늘〉에서 음악은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앞에서 끌고 가지도 않는다. 대신 음악은 철저히 한 발 물러서, 춤이 펼쳐지는 시간을 감싸는 배경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시간은 더 이상 서사를 조직하는 힘이 아니라, 몸이 견디고 머무는 장(場)이 된다. 이때 형성되는 것이 바로 ‘배경화된 시간’이다.


3) 김현자 안무 〈매화를 바라보다〉_ 시간의 흐름에 머물다


김현자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Homo Contemplativus, 관조하는 인간이다. 〈매화를 바라보다〉는 조선조 여성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산조라는 음악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매우 정갈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여성과 매화를 연결하는 매개는 산조다. 여기서 매우 묘한 정서가 발생한다. 산조는 계속 흐른다. 시간 또한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러나 춤은 그 흐름 속에서 정서를 머무르게 한다. 이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서도 동시에 머문다는 역설을 몸으로 드러낸다. 산조와 춤은 명확한 동작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여백과 잔향을 중시한다. 인간은 자연이 아니다. 사람은 매화가 될 수 없다. 이 작품은 ‘될 수 없음’을 정면으로 인정한 채, 그러함에도 ‘되어 보려는 마음’을 그려낸다. 산조를 통해 잠시 ‘되어 봄’을 경험한다.




김현자의 시간은 ‘지속의 시간’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무용수가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뭉치고 흩어짐을 거듭하는 이 모든 현상은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같은 정서 안에 오래 머무는 시간이다. 산조는 변주를 거듭하지만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끝까지 하나의 정서적 밀도 안에 머문다. 춤 또한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속의 시간, 곧 하나의 시간관(time regime) 안에서 논리와 정서의 밀도를 끝까지 유지해간다. 


〈매화를 바라보다〉는 ‘한국춤 미니멀리즘의 정점’이다. 무대 장치뿐 아니라 조명의 사용까지 극도로 절제된 점에서, 오히려 ‘미니멀리즘을 넘어선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음악이 더욱 그렇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춤 음악은 대부분 기존의 여러 음악적 소스를 혼합하거나 확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은 오직 가야금산조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춤과 음악은 이 미니멀리즘의 지점에서 완전히 합일한다. 〈매화를 바라보다〉가 선택한 산조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다. 지금까지 무용에서 주로 사용되어온 성금연류가 밝고 위로 뜨는 정서를 지녔다면, 김죽파류는 낮고 무겁고 아래로 가라앉는 성격이 강하다. 


김현자 춤의 기반은 신무용일까.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무용이라기보다, 1950년대 이후 ‘무용연구소 시대’의 춤과 연결된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춤의 흐름을 형성했던 황무봉과 연결된다. 김현자의 춤의 뿌리에는 황무봉이 있으며, 이 작품은 그 전통을 충실히 학습한 후, 전통춤과 창작춤의 사이에 그 장점을 김현자만의 산조춤으로 배치한 결과다. 〈매화를 바라보다〉는 철저한 ‘시(詩)춤’, 혹은 ‘춤시’다. 국수호의 춤이 ‘극(劇)춤’ 혹은 ‘춤극’의 성격을 지닌다면, 김현자의 춤은 서사보다 정서의 밀도를 택한다. 


이 작품은 산조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춤이다. 산조를 평가하는 두 가지 기준, 성음과 흐름을 모두 깊이 이해한 결과다. 장단 변화에 맞춰 춤의 리듬을 달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진모리의 전면적 발산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진모리는 예열에 가깝게 처리되며, 산조 전체의 흐름 속에서 감춤과 드러냄, 축적과 잔향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는 산조를 리듬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시간적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다. 김현자의 산조춤은 가야금 수법에서 출발한다. 싸랭의 강인함, 집는 주법의 다부짐, 연튕김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리듬감이 손동작을 거쳐 몸동작으로 확장된다. 이는 ‘가야금 수법과 춤 동작의 연관성’이라는 주제로 하나의 렉처 콘서트가 가능할 만큼 치밀한 구조를 지닌다. 


김현자의 춤에서 음악과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춤은 계속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은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산조의 장단 변화는 외피일 뿐, 내면에서는 여백과 잔향을 통해 하나의 정서를 끝까지 붙잡는다. 산조는 흐르지만, 그 안에서 시간은 머문다. 배정혜의 ‘번역된 시간’이 어긋남의 시간이라면, 국수호의 ‘배경화된 시간’이 몸이 견디는 장의 시간이라면, 김현자의 ‘머무는 시간’은 산조의 흐름 속에서 관조의 시간을 붙잡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인간이 될 수 없는 매화와 잠시 합일하는 시간이며, Homo Contemplativus가 살아가는 시간의 형식이다.


4) 조흥동 안무 〈바람의 시간〉_ 위계와 질서를 지탱하다


조흥동의 춤에 등장하는 인간은 Homo Hierarchicus, 곧 위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형은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보다, 질서와 서열 안에서의 자리를 먼저 인식한다. 조흥동은 자신의 춤 세계에서 가장 정점에 놓여 있는 한량무를 통해 이 인간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한량무는 본래 홀춤의 성격이 강해 위계와 질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량 또한 흔히 시간과 여유를 누리며 풍류를 즐기는 인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바람의 시간〉에서 조흥동이 제시하는 한량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에서 한량무는 군무화되며, 그 순간 한량의 성격 또한 변한다. 개인으로 존재하던 한량은, 위계적 질서 안에 위치하는 집단적 존재로 전환된다. 이는 루이 뒤몽이 말한 Homo Hierarchicus의 개념과 정확히 겹친다. 즉,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질서 속 위치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춤은 거문고 음악에 맞춘 홀춤으로 시작해 군무로 확장된다. 세 개의 집단은 다시 하나의 질서로 합쳐지고, 그 정점에서 조흥동 자신이 등장한다. 


태평소의 강렬한 음향 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춤은, 위계와 서열의 최상위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순간 〈바람의 시간〉은 감정이나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질서가 가시화되는 장면으로 작동한다. 이 작품 속 인간은 배정혜의 Homo Desiderans처럼 결핍을 향해 움직이지도, 국수호의 Homo Orans처럼 몸으로 기도하지도, 김현자의 Homo Contemplativus처럼 머물며 바라보지도 않는다. 이들은 오로지 질서를 살아내는 인간군이다. 이들의 춤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도, 초월도, 관조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오히려 자리다. 솔로에서 군무로, 파편에서 정렬로 이동하는 과정은 위계를 전제로 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 춤은 ‘한량무의 일무(佾舞)화’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인물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춤을 춘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리다. 조직 속에서 위계와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자리다. 이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바람의 시간〉의 몸은 흔히 민속춤에서 기대하는 자유롭고 호탕한 것과는 대비된다. 제멋에 겨워서 즉흥적으로 풀리는 흥취(興趣)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의 몸은 ‘춤추는 몸’이라기보다는 정해진 질서를 반복하고 재현하면서 터득한 ‘단련된 몸’이었다. 수련(修練)의 몸이었다. 따라서 이 춤에선 자유보다는 정확함, 표현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며 바라보게 된다. 〈바람의 시간〉의 무대에서 춤꾼이 서 있는 곳은 ‘시각적 위치’라기보다는 철저히 계산된 ‘서열적 배치(配置)’라고 함이 마땅하다.




〈바람의 시간〉은 춤과 음악을 어떻게 이끌어 갔을까. 이 춤은 조선시대 풍속화나 문인화 속 장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조흥동은 선비나 한량을 ‘문과적’ 인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남성의 군무, 나아가 무과적 신체성을 이 작품에 투영한다. 정적이고 고요한 시작은 점차 인원이 늘고, 악기가 더해지며, 군무를 향해 나아간다. 음악 역시 절주와 절도를 지켜가면서, 더욱 강력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거문고 솔로로 시작한 음악은 시나위 합주로 이어지고, 타악 중심으로 전환되며 긴장감을 높인다. 특히 조흥동이 등장하는 순간의 태평소는, 음악적 클라이맥스이자 위계가 선포되는 신호처럼 울린다. 


마지막에 이르러 무대 위에 도열한 다수의 출연자가 일무처럼 펼쳐내는 춤은, 무(舞)와 무(武)가 공존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를 순수한 춤으로 보기보다, 훈련과 조직의 몸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 작품은 조흥동의 한량무에 대한 재해석이자 확장이다. 군영의 수련을 연상시키는 오와 열의 전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집단적 신체성은, 여성 중심의 살풀이춤과 대비되는 남성 춤의 원형으로서의 한량무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자유에서 질서로 이동하는 이 춤의 시간은, 말 그대로 ‘조직되는 시간’이다.


4. 네 개의 춤, 네 개의 시간


〈거장의 숨결〉에는 사유와 성찰이 존재한다. 그 춤을 떠받치고 있는 인간 이해의 깊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 글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네 개의 춤은 각기 다른 음악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간의 성격을 만들어낸다. 번역된 시간, 배경화 된 시간, 머무는 시간, 조직되는 시간. 이 시간은 모두 ‘견뎌내는 시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인간형을 드러낸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과거가 만들어낸 결핍을 견디는 인간이 거기 있다. 세파와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하늘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믿으며 감내하는 인간이 거기 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인생의 3단계 구분이 아닌, 인생의 한 시점을 화양연화로 설정하듯 모든 것들과 유리된 채 관조 속에 침잠한 인간의 모습이 거기 있다. 군림하는 권위가 아닌, 조직된 위계 속에서 질서와 조화를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이 거기 있다. 이 네 인간형은 서로 대체될 수 없으며,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낸다. 그러나 이 인간형들은 단지 작품 속 인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춤들을 만든 안무가들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이 네 편의 춤은, 안무가들이 오랜 시간 견디며 살아온 자기 삶의 태도이자 시간관을 몸으로 드러낸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춤들은 설명되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다. 삶을 통과한 시간만이 가질 수 있는 밀도가, 춤과 음악의 결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번역된 시간에서는 시간을 살아내는 태도가, 배경화 된 시간에서는 시간을 맡기는 태도가, 머무는 시간에서는 시간을 붙잡는 태도가, 조직되는 시간에서는 시간을 통제하는 태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엄하게 존재한다.


5. ‘지금 이 순간’, 거장을 호출한 까닭


〈거장의 숨결〉에서 만난 네 편의 춤은 우리에게 묻는다.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 것인가.“ 다시금 생각해본다. ‘거장’이란 무엇인가. 완벽함이나 무결함의 존재가 거장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거장이란,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 시간을 예술의 형식으로 응답해낸 존재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국립무용단이 이 네 명의 안무가를 〈거장의 숨결〉이라는 이름으로 호출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의 춤에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이 가득하다. 그 춤은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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