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4-2 (2025.12.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니온씨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한국무용은 상상력이 창발하는 장르는 아니다. 헌신의 수행성으로 유지되는 한국무용의 세계가 지향하는 예술은 예술이라기보다 제사에 가깝다. 전통예술에서 분화되어 나온 컨템퍼러리 예술은 ‘지금’ ‘여기’와 감응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러한 컨템퍼러리 세계에서도 상상력은 수행성보다 앞에 놓이지 않는다. 영화 〈국보〉가 그려낸 가부키 세계처럼, 어떤 예술은 ‘펼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이 ‘이어짐’을 정체성으로 하는 세계에서 예술은 ‘장르’가 아니라 ‘가문’이 된다.
영화 〈국보〉를 예로 들었지만 한국에서 전통예술의 위치성은 가부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예술 안의 그 수많은 ‘유파’는 ‘가문’의 다른 이름들이며, 〈국보〉에서처럼 혈통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 선대의 유지를 잘 받들어 모시는 것이 존재의 의의가 된다.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 예술보다 제사에 가까운 이유다. 물론 제사가 예술이 아닐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질문을 달리 해보자. 예술이 제사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혹은 제사가 예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예술이 아니라 제사로, 제사가 아니라 예술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제사가 예술과 궁극적으로 분리되는 지점은 질문이 ‘봉쇄’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바꾸어, 질문을 ‘봉쇄’함으로써 존재의 의의를 지켜내는 무언가를 굳이 ‘예술’로 불러야 할 이유는 있는가?
그가 최승희의 몸에서 본 것


조진호의 〈전야제(前夜祭); 겨 터를 열다〉(이하 ‘전야제’)는 지난해 선보인 〈춤출 때 웃고 있지만〉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무용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춤출 때 웃고 있지만〉에서 발레와의 교차성을 통해 한국무용이 요구하는 여성상에 대해 질문했다면 〈전야제〉에서는 한국무용의 신체성에 대해 질문한다. 두 질문 모두 제주(祭主)가 아니라 인간이자 여성에게서 발원된 것일 뿐 아니라 질문 없는 세계에서 발생된 것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조진호는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을 준비하며 여성 무용수의 몸에 대한 리서치 작업을 하던 과정에서 신무용의 개척자로 1930년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승희가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무용이론가 황희정은 2016년에 발표한 논문 「최승희의 춤추는 몸과 일상에 나타난 근대 신여성의 여성성 연구」에서 이렇게 썼다.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고서도 전혀 위축됨 없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팔을 올림으로써 전통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겨드랑이를 전면에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중략) 몸짓 표정에서 전근대적 몸에서 벗어나 당시 신여성으로서의 자의식과 주체성 대담함을 읽을 수 있다.”
황희정의 논문은 조진호가 한 즉흥 잼에서 춤을 추다 예기치 못하게 겨드랑이를 잡혀본 ‘한국무용수’로서의 경험담을 일깨웠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낯선 감각을 황희정의 글을 통해 객관화하며 작업에 대한 초기 아이디어를 가다듬었다.
이를 위해 전작에서처럼 ‘다른 몸’과의 만남을 고민하던 그는 현대무용수 허윤경을 파트너로 선택하고 공동창작에 들어갔다. 공연은 신촌문화발전소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작으로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3회차로 진행되었고, 전작 무대를 함께한 조명디자이너 서가영, 사운드디자이너 목소, 의상디자이너 황석민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고 이세승과 이윤정이 자문으로 참여했다.
겨드랑이에 숨은 달
공연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허윤경이 등장해 무대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시작된다. 그는 바닥을 기어다니기도 하고, 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무대 왼편 장막 뒤로 사라졌다 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진짜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 아니면 망상 속에서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는지도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마침내 조진호가 무대에 나타나 이 궁금증을 풀어주리란 기대를 갖는 것도 잠시뿐, 둘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처럼 상대방을 멀뚱히 바라보며 외계어 같은 대화를 이어 나간다. 허윤경은 “야!”라며 조진호를 향한 것이 분명한 감탄사인지 호칭어인지 모를 단음절을 내뱉고, 조진호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하자 치맛자락을 들춰 보여준다. 허윤경의 치마에 ‘밤 야(夜)’ 자가 쓰여 있는 걸 본 조진호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들도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전야제’라는 제목의 공연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에 대한 기발한 프롤로그다.

공연은 ‘夜’라는 글자가 겨드랑이 안에 달을 감추고 있다는 재기 넘치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조진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평소에는 특별히 의식되지 않던 달이 누군가의 시선과 마음이 닿는 순간 특별한 빛을 발한다고 느낀다면서, 겨드랑이 역시 평소에는 그러한 신체 부위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지내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상대에게만 안심하고 드러낼 수 있는 내밀한 부위인 데 주목했다. 그는 우리가 관계의 거리가 좁혀지고 친밀함이 올라가는 어떤 순간이나 계기에 대해 ‘곁을 내주다’라는 표현을 쓰는 데 착안해 관계의 개폐성과 밀도, 거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곁을 내어준다
17세기 문헌에 따르면 ‘겨드랑이’는 ‘겯’(현재의 ‘겨드랑이’를 의미하는 옛말)에 접미사 ‘-으랑’이 붙어 ‘겨드랑’이 된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이후 ‘-이’가 결합해 ‘겨드랑이’가 되었다. 국어학자들은 ‘겯’이 ‘몸을 가까이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전야제〉는 조진호와 허윤경 두 다른 장르의 무용수가 어떻게 몸을 가까이하며 ‘겯’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사이가 되는지를 움직임으로 탐색한다. 두 무용수의 몸이 가까워지는 동안 움직임의 범위가 겹쳐지고, 호흡도 질감도 다른 움직임이 어색함 없이 어우러진다. 공연의 전개는 서로를 겨드랑이에 품어주는 과정이자 서로에게 달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터벌림과 강강술래로 이어지는 공연의 마지막 장은 신체와 움직임에 대한 상상력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허윤경이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누운 조진호는 다리를 길게 뻗어 발바닥으로 허윤경의 겨드랑이를 밟아댄다. 터벌림의 대무(對舞)를 해체해 다시 조립한 이 장면은 함께 춤을 추는 사이에서 서로에게 곁을 내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관계의 도착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윽고 둘은 달 아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신명을 나눈다. 각자의 몸에 밴 춤사위는 다르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난해 조진호의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을 보고 나서 리뷰에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무용의 우먼박스 바깥으로 나온 조진호는 이 불화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까. 우먼박스 바깥에서 길을 찾는 것, 이는 무대 안팎에서 길을 개척하는 현시대 모든 여성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조진호의 다음 발걸음이 어떤 공명음으로 무대를 울릴지 기다려볼 일이다.”
조진호는 곁을 내줄 수 있는 동료를 찾아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다음 발걸음을 내디뎠다. 겨드랑이에서 시작된 그의 터가 어디까지 벌어지게 될지, 다음 무대가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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