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4-2 (2025.12.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이 윤혜정 단장의 신작 〈미메시스〉(11.6.-11.9.,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올 시즌을 마무리했다. 상반기에 올린 〈스피드〉에 이은 두 번째 안무작으로, 서울시무용단은 두 편의 신작과 레퍼토리 작품 〈일무〉의 서울과 지역 투어 공연을 포함해 올해 진행한 모든 공연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무용단의 연간 정기공연 전석 매진은 창단 51년 만에 처음 세워진 진기록이다. 한 해 동안 누적 관객 수 1만 명을 돌파하며 전통춤이 관객층이 한정된 장르라는 편견도 깨트렸다.
‘미메시스(Mimesis)’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서사에 대해 비평할 때 외부 대상의 모방 내지 재현을 의미하는 용어로, 서술자에 의한 서술을 의미하는 ‘디에게시스(Diegesis)’와 쌍을 이루어 사용된다. 미메시스를 세계를 반영하는 현실성의 개념과 관련해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그는 이를 단순한 모방이 아닌 본질의 재현, 즉 개연성의 관점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세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윤 단장은 이 철학적 개념을 한국 전통춤의 미학에 접목했다. 한국 전통춤의 근원적 움직임과 자연의 흐름 사이에서 닮은 점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안무했다.

작품은 ‘교방무’, ‘한량무’, ‘소고춤’, ‘장검무’, ‘살풀이춤’, ‘승무’, ‘무당춤’, ‘태평무’의 8개 춤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춤은 다시 물, 바람, 흙, 번개, 허공, 하늘, 불, 시간이라는 자연 이미지와 연결된다. 고요한 물의 움직임과도 같은 교방무로 시작해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량무, 다시 땅으로 내려와 발디딤으로 흙을 감각하는 소고춤이 뒤따르는 식이다. 소고춤의 신명은 곧 번개가 내리꽂히는 장검무의 번뜩임으로 이어지고, 번개가 지나가고 나서 비워진 허공을 살풀이춤이 더듬는다. 하늘에 비원을 올리는 승무가 이어지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한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무당춤이 펼쳐지고 나면 온 세상을 밝게 비추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태평무로 마무리된다.

윤 단장이 이번 공연을 위해 엄선한 전통춤 레퍼토리 목록이나 8개 춤이 병렬되는 방식은 전통춤 공연에서 가장 선호되는 갈라 공연 형식이다. 익숙함과 진부함 사이에서 안무가는 무엇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공을 들인다. 전통춤 공연 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창작(creation)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배치(arrangement)했는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안무가에게 중요한 역량은 안무보다는 큐레이션 능력이다. 전통춤이 엄격한 형식미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에 대한 감수성 역시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만큼 큐레이션을 통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가가 공연의 성패를 좌우한다. 여기서 ‘설득력’이란 관객과 무용수 양자를 모두 겨냥한다.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선 무용수가 먼저 설득되어야 한다. 큐레이션이 무용수를 굳이 ‘설득’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설득’ 여부에 따라 공연의 완성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선보인 〈스피드〉가 안무 능력에 대한 시험 무대였다면 〈미메시스〉는 큐레이션 능력에 대한 시험 무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쉽지 않은 두 개의 시험대를 통과하며 윤 단장은 두 공연 모두 전석 매진이라는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성공적인 증명을 마쳤다.
윤 단장은 전막 프레스콜 무대가 끝난 뒤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구상하며 레퍼토리를 선택할 때 각각의 춤이 겹치지 않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종 선택된 〈미메시스〉를 구성하는 8개의 춤에서는 그 춤이 추어지던 시절의 ‘사람’이 드러난다. 교방무의 기생, 한량무의 선비, 소고춤의 농사꾼과 장검무의 무인, 승려와 무당과 왕과 왕비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이미지를 빌려 관객과의 교감을 이루되 그러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일 동안 4회차로 진행된 공연에서 눈에 띄는 점은 교방무와 소고춤, 살풀이춤, 승무에서는 무용수들을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전 무대의 더블 캐스팅을 꾀했다는 점이다. 〈스피드〉에서 솔리스트 무용수 김민지와 노연택을 더블 캐스팅해 같은 춤의 다른 운영을 보여준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대 단위의 스케일로 확장한 셈이다. 또한 〈스테이지 파이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스타 무용수로 떠오른 기무간이 객원 무용수로 참여해 무대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지원 디자이너의 의상과 최다희 스타일리스트의 쓰개와 장신구 등 코스춤 디자인은 공연의 완성도를 뒷받침한 숨은 공신이라 할 수 있다. 공연의 시작점인 교방무에서 무용수들은 상체에 달라붙는 타이트한 저고리와 버슬 드레스처럼 허리 뒷부분을 부풀린 하후상박(下厚上薄)의 의상과 반투명한 차양이 곡선을 이루며 뾰족하게 치솟은 검은색 쓰개를 착용하고 등장한다.
뒤이어 한량무의 검푸른 도포나 흙빛을 닮은 소고춤의 노란색과 갈색 바지와 치마 등 춤이 바뀔 때마다 현대성이 입혀진 세련된 의상들이 차례로 등장해 우아하고도 역동적인 춤사위 못지않게 눈을 즐겁게 한다. 고도의 장식성으로 무장한 화려한 의상들이지만 춤을 침범하지는 않는 선에서 멈추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주며 상반기 국립무용단의 〈미인〉이 무엇을 놓쳤는지 다시금 곱씹게 만든다.
한국무용이, 특히 이처럼 전통춤을 재구성한 공연이 유독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은 이제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미메시스〉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예술에서 ‘재현’의 의미와 방향성을 다시 질문하며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공연에 또 다른 의미 있는 답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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