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4-2 (2025.12.20.) 발행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_ 박병민(사진가)
EGERO는 이번 공연이 ‘지속 가능한 창작 기반의 구축과 연대적 성장’을 이루려는 단체의 장기적인 목표 실현을 위한 과정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의 한 축은 ‘치유’이고 다른 축은 ‘성장’이다. <몸 틀>(2025년 11월 22-23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은 ‘성장’ 부분에서 ‘작품 개발’ 단계이다. 정교한 기획임을 밝히고 있는데, ‘몸틀’ 개념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쉽게는 훈련을 통해 춤추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 즉 '춤추는 몸의 틀'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몸 틀’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개념이다. ‘몸 틀’(프랑스어: schéma corporel)은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철학에서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메를로-퐁티는 니체 다음으로 몸에서 정신이 나온다고 하면서, 몸의 실천적인 운동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사유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몸 틀’은 머릿속에서 신체를 그림처럼 ‘표상’하는 지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 몸의 부분들이 하나의 전체로 협응 하고, 공간, 사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세·거리·가능한 동작을 즉각 조율하는 능동적 구조다. 이때 ‘능동적’이라는 말은, ‘몸 틀’이 단순히 내부 감각의 총합이 아니라 세계에 열려 있는 실천적 체계라는 뜻에 가깝다. ‘몸 틀’을 이렇게 이해하면, EGERO가 밝힌 이번 공연의 의도에 가깝게 갈 수 있을 것이다.
<몸 틀>은 네 명의 젊은 안무가가 선배 안무가의 멘토링을 통해 완성한 신작 네 편을 선보인 공연이다. 네 작품은 안희주 안무 〈Throw off〉(멘토 최진한), 강건 안무 <러버넥>(멘토 지경민), 베진아 안무 <부서진 나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멘토 신승민), 조동혁 안무 〈Give me〉(멘토 이용진) 등이다.
밴드와 저조도의 조명, 내밀한 감정의 구조
안희주의 〈Throw off〉(출연 안주희, 엄지민)의 모티브는 산후우울증이다. 산후우울증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키우는 과정에 찾아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회의가 병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목인 ‘throw off’는 ‘throw off depression(우울감을 떨쳐내다)’인 듯하다. 내밀한 감정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안희주는 몸을 옥죄는 밴드와 낮은 조도, 협소한 조명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 이전에 자기가 가졌던 많은 것을 다시 갈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밴드로 연결된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자아이며, 과거의 나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식이라는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춤의 기교보다 감정 전달에 집중했다.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상징들을 차분하게 이용해 내밀한 감정을 풀어 나간 안희주가 바라는 것은 공감과 위로이지 싶다.
서사 없는 긴장, 리듬의 길항
강건의 <러버넥>(출연 강건, 이보미)은 관계의 긴장과 균형을 감정에 집중해서 표현하지 않고, 움직임으로 직조해 낸 작품이다. 작품은 두 인물을 동작을 통해 서로 긴장하고, 불안하다가 다시 복원해 내는 상황을 보여준다. 멜로디 없이 소음처럼 깔린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의 긴장을 끌고 가는 바탕이다. 초반, 중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관계 변화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서사를 생성하지는 않는다. 안무자는 ‘작용 속에서 움직임의 리듬을 형성하고, 그들의 여백 속에서 관객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관객에게 남기는 질문은 무엇일까. 예컨대 ‘관계의 균형은 어디에서 무너지는가?’, ‘우리가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회복인가? 반복의 다른 이름인가?’ 같은 질문들이다. 다만 작품은 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보다, 끝내 몸의 길항으로만 밀어붙인다. 춤만이 할 수 있는, 현상을 순수한 몸 이미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 사고의 빈틈을 파고들 뿐이다.

강건 <러버넥>
등을 돌린 몸, 누구도 듣지 못한 진동
배진아의 <부서진 나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출연 김민국, 배진아, 장진솔)는 관계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내면을 몸이 반응하는 현상으로 감지해 내려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듣지 못했다’이다. 상대를 듣는 일은 보는 것보다 더 가까워야 하고, 상대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 속의 불안과 충돌을 알아채고 공감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의 키워드가 ‘누구도 듣지 못한 내면의 진동’이 된다. 작품 중반부까지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 이어지는 점이나, 조명 조도 변화를 활용하는 방식, 무엇보다 한 번도 일어서지 않고 이어가는 움직임은 어떠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거울을 마주하듯 철저히 자신을 향한 행위다. 무용수 셋이 끝까지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훤히 드러낸 등과 검은 바지가 대비되는데, 검은 바지는 무대 바닥에 묻혀 마치 지지할 곳 없이 떠도는 흔들리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자기 고백이며 독백이다. 그래서 작품은 꿈틀거리는 적막으로 가득했다.
채워지지 않는 컵, 집착의 굴레
조동혁의 〈Give me〉(출연 이현지, 조동혁)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집착)의 굴레를 몸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옅은 조명이 들어오면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든 남녀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물이 반쯤 담긴 컵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보기에 따라 연인일 수 있고, 내면의 자아이거나 살면서 마주치는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어떠한 것을 자기에게 줄 수 있는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목 ‘Give me’에 담긴 의미는 그런 대상을 향한 요구가 된다. 두 사람은 거의 떨어지지 않고 얽히면서 움직임을 이어가는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미지다. 집요한 관계를 통해 이 작품이 보여준 것은 마지막에 물컵을 던지는 것처럼 관계 속에서 결국 자기를 모두 소모하게 되는 모순이다. 관계가 존재 의미를 더하기보다, 반대로 의미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Give me〉는 수동적 태도로 욕망을 채우려는 존재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메를로퐁티의 ‘몸 틀’이 단순한 개인의 신체 내부 구조가 아니라, 세계를 체화된 방식으로 구성하는 근본적인 수단이라면, 인간은 ‘몸 틀’을 통해 세계를 '측정'하고 '거주'하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사물을 파악한다. 즉, ‘몸 틀’은 주체(나)와 객체(세계)가 만나는 지평인 셈이다. 이번에 선보인 네 편은 각기 다른 감정의 사건을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조율(거리·등·무게·붙잡힘·빠져나감)로 번역해, 세계와 타자에 대한 체화된 측정 단위를 제시하면서, ‘몸 틀’이라는 수단으로 EGERO의 작품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희주 〈Throw off〉
이번 기획이 부산 춤계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문제 가운데 서 있는 당사자들이 현장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지지하고 공감한다. 결국 이 기획이 남겨야 할 것은 ‘좋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부산에서 춤이 다시 태어나는 방법의 기록이다. 멘토링의 전후를 관객이 알 수 없는 구조라면, 다음 기획에서는 과정의 층위를 공유하는 장치를 더 과감하게 마련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최소한 ‘스케치-중간 공유-프리미어’ 3단계 공개(혹은 짧은 리서치 노트 공개) 같은 장치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몸 틀’이라는 단어가 표지로만 남지 않기 위해, 각 안무가가 무엇을 어떻게 조율하며 세계에 거주했는지를 거리, 무게, 시선, 등 몸의 윤리까지 포함하는 작업 언어로 남기는 것도 좋겠다. 남성 멘토 편중의 아쉬움 또한 ‘젠더 형평’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지형을 넓히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부산에서 춤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누가 허락해 주는 명제가 아니라, 우리가 매번 새로 증명해야 하는 살아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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