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CCTV로 들여다본 디스토피아의 그늘: 홍콩시립현대무용단 〈Mr. Blank 2.0〉

공연비평

Vol.123-2 (2025.11.20.) 발행


글_송준호(춤평론가)

사진제공_ HK ADC 홍콩예술발전국



최근 창작 무대의 주된 경향 중 하나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불안감을 인간 실존과 연결하는 시도들이다. 이것은 국내에 한정된 현상만은 아니다. 근래에 한국 무대에 소개되고 있는 해외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위크 2025’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던 홍콩시립현대무용단(CCDC)의 〈Mr. Blank 2.0〉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빅 데이터’와 ‘감시 사회’를 키워드로 하는 이 작품은 무대와 객석을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거대한 프레임으로 재편해 관객을 그 담론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연출과 안무를 맡은 CCDC의 예술감독 상 지자(Sang Jijia)는 2018년 초연한 〈Mr. Blank 2.0〉를 확장한 버전으로 이번 무대를 채웠다. 작품의 제목이자 모티프인 ‘Mr. Blank’는 국내에는 『빵굽는 타자기』로 유명한 소설가 폴 오스터의 『기록실로의 여행』의 주인공 노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억을 잃고 폐쇄된 방에 갇혀 자신의 근원을 추적하는 노인은 말 그대로 ‘텅 빈(blank)’ 인물이다. 여기서 그의 모습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통해 작가는 주체적인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형이상학적 자아 탐구의 서사를 도출해낸다. 상 지자는 이런 인물 설정과 카메라의 감시 모티프를 CCDC의 공연에 상당 부분 활용했다. 또한 소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복원하기 위한 노인의 분투는 무대 위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과 상황으로 분화됐다. 이때 압제를 가하는 쪽과 당하는 쪽이 선명하게 대비되며 ‘텅 빈 인물’의 의미는 감시 사회의 담론과 맞물려 동시대의 의제로 확장된다.



이러한 작품의 개성과 방향성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대미술이다. 무대 앞쪽에는 투명 패널이 세워져 마지막까지 객석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는 관객을 프로시니엄 무대 안쪽 세계를 관찰하고 감시하는 존재처럼 여겨지게 한다. 이러한 프레임은 공연 시작부터 무대 뒷벽과 스크린에 투사되는 문구 ‘These premises are under CCTV surveillance for your personal safety and security(이 건물은 귀하의 개인 안전과 보안을 위해 CCTV로 감시되고 있습니다).”로 더욱 공고해진다. 투명 패널을 통해서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여다보게 하는 세트 디자인은 관객들을 관찰자의 관점에 두는 듯하다. 선명하지 않은 패널 때문에 흐릿하게 여과되는 너머의 상황은 객석에 앉은 이들을 무대 안의 세계와 명확하게 분리시켜 이런 추측에 힘을 더한다.




더욱이 중계 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포착되는 패널 너머의 움직임들은 언뜻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CCTV 네트워크로 유명한 중국의 감시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압제와 저항으로 이뤄진 몸짓의 역학 관계와 이를 집요하게 뒤쫓는 카메라의 날것의 시선은 최근 몇 년간 국제 뉴스에 보도된 중국의 현황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중계 영상이 객석을 비추면서 간단히 전복된다. 그 세계의 수많은 ‘관찰되는 몸’이 실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당면한 문제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 인물들의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과 이를 하나하나 추적해 담아내는 투명 패널 개별 창들을 통해 그 생각들은 확실해진다.


작품의 메시지가 세트 프레임의 설정에 대부분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에 움직임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즉 감시 사회와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선명한 프레임은 이 작품의 강력한 개성이자 동시에 한계가 된다. 이미 당도해 있는 디스토피아의 그늘을 환기하는 목적에서는 일찌감치 성공하지만, 이후 대안적인 메시지나 창의적인 해석을 기대하는 대목에서는 좀처럼 변화의 조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상 지자는 후반부에 안무의 변화를 통해 감시 사회의 일면을 동시대의 공통 담론으로 확장하려 한다.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해 무대 곳곳에서 무력하게 있던 존재들이 한데 뭉치면서 그 변화는 시작된다. 연대와 협력의 집단 움직임을 통해 무형의 체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전개는 인류에게 닥친 또 다른 위기를 각성하자는 외침이다. 


다만 이러한 안무적 변화는 당도한 현실을 재현하는 프레임에 가려져 여전히 힘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결말부에 상수 쪽에서 문이 열리며 잠깐 등장하는 빛의 연출이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찰나 비친 빛은 디스토피아의 희망이자 동시대에 대한 경고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존재들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연출은 다분히 현실 비판적이고 비관적이며, 그래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목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런 뉘앙스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경향이 있어, 만약 차후 작품이 ‘3.0’으로 보완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를 중심으로 의미의 확충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비평지원 안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로고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