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콜렉션 [움직임 한 점]
Vol.128-1 (2026.4.5.) 발행
글_ 김은주(아트캐스터)
pace.opend@gmail.com
[움직임 한 점]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의 감각과 시선을 풀어내는 기록이다. 그림을 통해 춤을 보고, 춤을 통해 다시 그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문자들이 움직임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Henri Matisse “La Danse” (1910)
붉은 몸, 푸른 하늘, 초록의 땅.
단 세 가지 색이 화면을 채운다.
원근도, 세밀한 묘사도 없다.
근육의 정확성 대신 감정의 속도가 화면을 지배한다.
몸은 단순하지만 에너지는 과감하다.
색은 서로를 밀어내며 공간을 넓힌다.
다섯 인물은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춘다.
누군가는 기울고
누군가는 발이 허공에 떠 있다.
완벽한 균형은 아니지만
그들은 끝내 손을 놓지 않는다.
마티스는 형태를 단순화하고 색을 해방시켜 회화를 감정의 언어로 확장했다.
<춤>은 그가 남긴 가장 강렬한 리듬의 선언이다.
필자는 이 그림을 아주 어릴 적 처음 만났다. 집에 걸려 있던 달력에서였다. 동그랗게 손을 잡고 뛰는 사람들. 방방 뛰는 듯한 그 리듬.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그림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달력을 들여다보곤 했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이제 와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춤’이 아니라 함께 상승하려는 에너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마티스는 20세기 초, 색으로 회화를 다시 쓰기 시작한 화가였다. 그는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 대신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색을 선택했다. 강렬하고 거친 색채는 당시 미술계의 질서를 흔들었고, 이러한 태도는 훗날 ‘야수파’라 불렸다.
야수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마티스에게 색은 공격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형태는 단순해지고, 색은 자율성을 얻었다.
1910년에 제작된 작품 <춤>은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섯 명의 인물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춘다. 배경은 단 세 가지뿐이다. 붉은 몸, 푸른 하늘, 초록의 땅.
원근도, 세밀한 근육 묘사도 없다.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몸 대신 감정의 속도가 화면을 지배한다. 몸은 단순하지만 에너지는 과감하다. 색은 서로를 밀어내고 당기며 공간을 넓히고, 인물들의 원은 화면 바깥까지 이어질 듯 회전한다.
마티스의 삶 역시 하나의 긴 움직임이었다. 법률을 공부하던 청년이 병상에서 그림을 시작했고, 이후 평생을 색의 가능성에 몰두했다. 전쟁과 병마를 겪으면서도 그는 삶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았다. 말년에 몸이 자유롭지 않았을 때조차 종이를 오려 붙이며 또 다른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움직임을 향해 있었다.
화면 속 인물들을 보면, 완벽한 균형은 아니다. 누군가는 몸이 기울고, 누군가는 발이 허공에 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손을 놓지 않는다. 이 원은 완전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서로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지속된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원을 따라 움직인다. 팔을 따라 흐르고, 허공에 뜬 발에서 잠시 멈춘 뒤 다시 연결된 손으로 돌아온다. 춤은 상승하려는 몸짓이다. 땅을 딛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 열린 자세. 개인의 기교를 과시하는 장면이 아니라, 함께 움직일 때 생겨나는 감각이다. 이 그림은 기술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과 손을 맞잡고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질문을 알지 못했다. 그저 신이 나 있었다. 이제 와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본 것은 ‘춤’이 아니라, 함께 뛰어오르는 에너지였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리듬, 중심이 흔들려도 유지되는 연결이었음을 말이다.
정적인 회화이지만 감각은 계속 회전한다. 우리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리듬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과 손을 맞잡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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